묵상자료 8294(2024. 1. 31. 수요일).

시편 시 42:9-11.

찬송 2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은 길을 잃으면, 제 집으로 돌아오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해가 져 버리면 밤눈이 어두운 말은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때 길 잃은 말을 목장으로 인도하는 것은, 자신의 동료들이 내는 원앙 소리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동료를 염려한 말들의 움직임은, 목 아래 길게 늘어진 방울, 원앙을 평소보다 더 크게 흔든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산 전체에 울려 퍼지고, 말은 그 원앙 소리에 의지해 집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말을 옮기지요.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 원앙 소리처럼 나직하게 누군가 그 마음을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가져 봅니다.

    우리 마음에도 내공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 공력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했으면 좋겠습니다. 엇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반복하고, 그래서 매번 비슷한 교훈을 얻으면서도 마음은 왜 그리 늘 처음인 것 같은지 모르겠네요. 그럴 때면 세월이 살아온 시간이 참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스로의 나이가 부끄럽기도 하고요. 경험이 모여 지혜를 만들어간다는 말이 진리이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저 힘없고 부끄러운 하나의 순간이지만, 이 날의 경험과 기억들이 모여서, 같은 일이 다시 왔을 때, 그 댄 좀 더 의연하고 현명하게 모든 것을 대처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그저 믿는 수밖에 없을까요? 그 믿음이 진리를 거스르지 않기만을 마음으로 바라면서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131일 방송>

 

2. “생명의 빵 3(52-59)”을 읽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주님의 말씀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기에 벌써 저의 묵상에서도 3번씩이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유대인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의견이 오늘의 말씀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이냐?” 고 말입니다. 이런 의견 또는 질문은 초대교회에서도 줄기차게 던져졌던 것인데, 순교자 저스틴의 책 <변증서>에 보면 1부 격인 말씀의 예배를 마친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세례 받은 사람들만 따로 남아서 교회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2부에 해당되는 성찬의 예배를 드린다고 변증합니다. 그런데 이 성찬의 예배에서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는 말과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라.”는 말을 하면서 떡과 잔을 나눈다고 변증합니다. 이렇듯 변증이 필요할 정도로 거짓된 소문이 무성했던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잡아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의미상으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에, 이를 성찬 의식에서 우리 인생을 위해 주신 살과 피로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과 피를 의미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화체설도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정말 잘 들어두어라.”는 말씀과 함께, 성찬의 무게와 가치를 충분히 강조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인자의 살고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산골 성당(공소)에도 적어도 1년에 한 두 차례를 영성체를 거행하기 위해서 관할 사제가 방문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영국의 유명 작가 A. 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종교 소설이었습니다.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라.”하신 말씀이 지정하는 떡과 잔이라는 점입니다. 화학적인 성분이 달라졌느냐 여부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머무른 떡과 잔이라는 점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인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실제적인 우리들 삶에서 이런 신앙적 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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