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44(2024. 3. 21. 목요일).

시편 시 52:8-9.

찬송 3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남녘에서 하나 둘 들리는 꽃 소식을 통해, 계절을 실감하게 됩니다. 머지않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온통 꽃인 그런 순간이 오겠지요. 싱그럽고 눈이 부시만큼 밝고 환한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일수록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괜스레 걱정되기도 합니다. 아 뭐 자격지심일 겁니다. 꽃을 곁에 두고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부담스런 마음은, 이 계절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자 결례겠지요?

    “살아 있어 눈부시구나/ 땅에서 땅으로 다시 살아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구나/ 그대 얼굴 바라보면/ 수만만의 환희/ 다시 그리움으로 물결치는데/ 살아서 외롭던 사람/ 눈부신 기쁨으로 피어나라고/ 봄날은 온다네/ , 살아서 괴로운 사람/ 고통 근심 잊으라고/ 하늘 소식 전하네/ 깨어있어 눈부시구나/ 긴 어둠 이기고 다시 살아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구나/ 그대 모습 바라보면 하늘 가득 햇살/ 다시 무지개 되어 비쳐드는데/ 살아서 괴롭던 사람/ 이제는 환한 나라 향기로워라/ 새날은 온다네/ , 살아서 외로운 사람/ 새 생명 길 바라보라/ 하늘 편지 전하네.”

    볕이 무척 좋은 날 양지쪽에 잘 내어 말린 빨래처럼, 습기 없이 보송보송한 느낌을 주는 곡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에 생기를 더해 주듯 밝은 곡의 분위기가 기분까지 경쾌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노 유섭의 시 <봄 꽃>은 작곡가 박 희재와 김 대웅이 각각 작곡을 한 두 곡의 가곡이 존재합니다. 작곡가 박 희재가 곡을 붙인 이 곡 봄꽃은 무척 활기 넘치는 곡이지요. 주로 서정적이고 애상적인 곡들이 많아서인지, 이런 명랑한 가곡이 더 반가운 기분이 글이 담고 있는 봄의 희망, 그 메시지를 작곡가는 음악적으로 밝게 표현했습니다. 2007년에 열렸던 제 8회 서울 창작 합창제에서 특히나 주목 받았던 곡입니다. 노 유섭 시 박 희재 곡 <봄 꽃>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3일 방송>

 

2. “새 계약의 일꾼2(7-18)”을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돌판에 새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칠 소명을 받은 일꾼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돌판에 새긴 율법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34:29-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서는 찬란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34:33, 35). 두 번째 일꾼은 성령께 소명을 받은 일꾼인데, 그는 사람들에게 죄와 죽음의 굴레 아래 살고 있을 때, 그들에게 무죄 석방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모세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들이란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자로 전하는 첫 번째 일꾼들은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율법사와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맡은 직무는 율법의 앞부분이었습니다. 매우 엄격하고 준엄한 법조문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말미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 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의 무서운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이유와 중요성을 얘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상처를 입지 않도록, 심지어는 죽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부터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일꾼이 있었는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맡은 자들은 이미 죄와 죽음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에게 꾸짖고 충고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먼저 그들을 살리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의 자리는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나,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불쌍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책망이 필요한 사람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인간들만이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래도 여유 있었던 시간은 언제였던가 하고 말입니다. 가정교육을 받던 6년과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다니던 12, 합해서 18년의 시간들이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바쁜 시간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고전을 읽고 가곡을 목청껏 부르고 교장선생님의 설교를 듣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다시없었던 여유 만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넉넉했던 시간에 인생을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책망이 필요한 사람으로 살았던지, 아니면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요? 여전히 책망이 필요한 사람으로 진땀을 흘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어느 쪽이든 위기의 때를 지나가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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