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07호(2025. 8. 31. 토요일).
시편 78:67-69.
찬송 36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신학교에서 동문수학을 하다가 다른 교파에 가서 주교의 자리에까지 오른 친구가 요즘 빅터 플랭클의 로고테라피에 심취하여 가끔 글을 보내주고 있어서, 오래 전에 사 두고 몇 장 넘기다가 책장에 꽂아 두었던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를 다시 꺼내들었다. 참고로 이 책은 1980년 5월 26일에 구입했다 씌여 있었다.
“프랭클의 학설을 빈의 제3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쾌락을 지향하는 의지(Will to Pleasure)’라고 보며, 아들러는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정신면을 연구하고 있으니 기본적인 경향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Will to Powerd)’라고 규정한다. <중략> 프랭클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 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Will to Meaning)’라고 주장한다. 곧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는 충족감이요, 사명감이라는 것이다. 곧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대답이 문제라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가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묻지 말고, 네가 너의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한 것은 프랭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생의 도전을 받아서 응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정태시 역, 죽음의 수용소, pp.5-6.
2. “사울의 개종 2(10-19a)”을 읽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바꾼다거나, 신앙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신념과 신앙 위에서 그 사람의 인생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체 다 무너져 내리는 파산을 겪을 수 밖이니 말입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는 기독교 세계의 무기력함을 뒤늦게 깨닫고, 그렇게도 목숨걸고 싸웠던 당시 독재자인 폭군에게로 오히려 전향/轉向하는 어느 목사의 신념과는 비교해선 안 될 일이다. 그분의 논리라면 허술한 개신교 보다는 당시 로마 가톨릭으로 전향하는 게 더 논리적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그의 삶과는 정반대인 새로운 사상을 따라 기독교계의 두목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허술한 신념과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이었으니, 그는 세속적인 성공주의 쪽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사울의 개종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사울의 개종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음성이었고, 사울의 눈이 멀게 한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하나님의 종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소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과 주님의 출현이라는 전무후무한 신비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아나니아는 사울을 돕는 것에 소극적이었는데,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시대경륜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넷째 주님의 강권하심으로 아나니아는 사울이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가서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고, 자신은 예수님의 심부름꾼임을 밝힙니다. 다섯째 성령을 받은 사울은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은 후 애찬을 나눌 공동체에 편입된 것입니다.
사울은 당시 율법학교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보기 드문 인재로, 식견은 물론 실천력도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영웅적인 위인이었습니다. 이런 지식인에 행동력까지 갖춘 사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출세욕이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아니었다고 성경은 밝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울의 개종과 이후의 활동은 하나님 중심적인 계획과 역사/役使였음을 말씀합니다. 박해를 받고 있던 초대기독교회 지도자들은 박해자로 등장한 사울을 반가워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유대 지도자들을 대표해서 유대 지역은 물론 이방지역으로 기독자들을 색출하는 악행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라는 초월적인 활동으로 사울을 변화시켜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당사자인 사울은 물론 초대교회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뒷배라는 확신을 갖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뒷배가 되심을 믿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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