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46호(2024. 10. 9. 수요일).
시편 87:1-3.
찬송 54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헤르만 헷세의 <들을 건너서>가 어울리는 시를 소개하고 싶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건너서 바름은 간다. 들을 건너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거리 위를 나뭇잎으로 날려가고, 나뭇가지 위에서 새는 지저귄다. 저 산 너머 어딘가 엔 머언 고향이 있는 것이다.”
2. “야고보를 방문한 바울(15-26절)”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야고보 사도를 만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대한 기괴한 소문과 악선전을 바울 사도는 물론 예루살렘 교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소 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회당에서 바울이 어떤 말로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전도하였는가를 잘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의 하나님을 증거하기도 하였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 당하신 것에 대해서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의 관점의 차이는 컸습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으로 죽인 예수가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이단사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때문입니다. 그 간격을 메꿔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으나, 아직도 요원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바울은 유대인의 심기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이단아가 아니라,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이웃사촌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이방인에게 행하였던 정결례를 유대인들 앞에서 증거처럼 재연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사람의 이방인을 유대인들 앞에 데리고 가서, 정결의식을 행하고 그 비용을 바울로 하여금 지불하게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땅에서 바울이 설교하고 비판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유대인들의 구미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한국 땅에 세워졌던 초대교회에서도 비슷한 실례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금과옥조처럼 마르고 닳도록 읽고 닮아보려고 힘썼던 1930년대에서 1970년대의 우리 강단의 설교는 공자의 도덕경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기독교회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런 무당 굿거리패가 아니라는 점을 증거하는 충분한 노력이었다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그런 도덕재무장 단체처럼 강조하고 강조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또 다른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신판 바리세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종교는 윤리나 도덕의 핵심을 능가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한말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박해를 받았던 무부/無父 무군/無君하는 짐승의 무리로 매도될 테니 말입니다. 제가 서울로 전근하게 되어 맡았던 교회에는 열성파 아들을 둔 여자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남편이 교회의 죽기보다 싫어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제 부모의 생일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자식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 형제 일가친척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기독교 신앙을 이런 천박한 근시안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성경은 이들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도덕성과 윤리의식 그리고 역사의식을 가르치고 있는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기독교회가 현실 사회를 향해서 아쉽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역사 속에서의 현실 참여 의식을 가져야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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