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제가 예배를 드린 어느 감리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출타하셔서 대신 설교하게 되었다는 분이 택하신 본문은 눅 10:25-37의 말씀이었습니다.
제목은 <영생과 자비> 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영생을 얻기위해 할 일을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성경에 무엇이라 말씀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 때 율법사는 주저함없이 <쉐마교리>를 외우듯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사실 이 쉐마교리는 아주 오래 전에 십계명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교사가 되물은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웃을 모르고 있는 그 율법사와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서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의 주제는 우리의 이웃이 누군가를 찾는데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는 엉뚱하게도 룻기의 얘기를 장황스럽게 꺼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모압지방으로 피난을 간 나오미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세 남자가 죽고 세 과부만 남았다는 얘기도 이어집니다.
잘 아는대로 다시 유대에 풍년이 들어 돌아오려고 하는데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그들을 친정인 모압 땅에 남겨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한사코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오게 되고,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의 첩이 되어 훗날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와 사마리아 사람을 연결시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기업무를 자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이리저리 뜯어 맞추고 있었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말은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의미보다는,
과부가 된 사람의 남편구실을 하게 된다는 아랍의 수혼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청상과부의 미래를 열어준 것에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낳아줄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됨과 룻의 남편 역할을 하는 것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당한 설교를 듣고 우리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이런 설교를 하고 있구나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제목은 왜 그렇게 잡았는지 결론도 엉성합니다. 그리고 아멘만 유도합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 귀한 자리에서 헛소리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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