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팩트(fact)라는 단어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명 "커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흥미위주의 청문회 질문에서

팩트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 때문인지 국민들도 팩트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설교자들에게서도 이 팩트가 매우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팩트를 제대로 모르거나 실은 알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보통 아닌 문제가 생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가게에는 반드시 걸려 있는 액자가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이 액자를 많이 사서 교인들의 집들이용 혹은 개업선물로 드렸습니다.

제가 자주 찾는 기독서점이 을지로 6가에 있는데 사장님께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팔린 집들이 선물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예상대로 앞서 말씀드렸던 바로 그 액자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이 말씀이 개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적절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미미합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창대해 지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이 구절은 안성맞춤이고 최상의 신의 한 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사용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장 개업하는 교우의 사업체 만이 아니라, 설교에서도 조심조심해야 할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언제 어떤 의도에서 그 말을 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언어활동이란 단순히 표현된 말 그 자체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과 그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는 그 진정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이 말을 한 장본인은 하나님도 욥도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꾸중하고 있는 욥의 친구들 네 사람 중 하나인 빌닷이라는 사람입니다.

빌닷과 함께 등장하는 엘리바스, 소발 그리고 엘리후도 장황한 말로 욥을 비난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나 주장이 욥기의 신학에서 부정되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네 친구들은 욥의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꺾어보려고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는 욥에게 대못을 치는 비아냥의 뜻으로 사용한 말이라는 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는지는 몰라도 진정한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욥이 성공한 인물이었으니까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시기와 질투심이 항상 그들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차에 

마침 욥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옳다구나 잘 됐다 하는 심정으로 욥의 심장에 대못을 박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의도는 아주 못된 심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흔해빠진 속담 한 구절을 찾아내어 욥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괴롭히는 말을 두고, 아무리 미화해도 그 동기가 악하다는 뜻에서 곤란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축복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말로 이해해야 옳은 것입니다.


둘째는 고도의 심리전법으로 욥에게 능지처참의 형벌을 주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하는 최고의 형벌로 능지처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오르게 하는 것처럼, 

서서히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죽게하는 형벌인데, 

살아 있는 사람의 팔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심장을 도려낸 후에 목을 자르는 형벌이 그것입니다.

욥은 지금 말로 다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형벌을 받고 있는데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해서 더욱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국에 친구들마저 비아냥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현실감이 전혀 없는 말로 욥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말려죽이려는 그런 심보를 들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빌닷의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말하는 이의 의도가 분명한 이상, 

이 구절을 더 이상 개업축하나 어떤 축원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문자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의 죄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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