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저는 성경 읽기에 공을 들여야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대충 훑어보고 자기 주장을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에 한국의 유명 설교자들을 한 칼에 베어버린 설교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성결교회의 김용섭목사라는 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설교는 역사비평에 의존한다 했습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말입니다.

역사 비평을 길게 설명해야 하겠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Text in Contex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삶의 자리를 갖고 있으며, 또 다른 독특한 삶의 자리를 가진 청중에게 전해야 합니다.

해석이라는 말은 처음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오늘 청중들의 삶의 자리로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역사 비평적 자세가 아닌 진공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위험한 문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눅 10:27-37을 본문으로 한 어느 설교자의 설교를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제목은 "선한 이웃으로 살자." 였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본문입니다.

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율법사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이라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자는 대뜸 이 두 개의 질문이 잘못돼 있다고 폭탄 선언을 하였습니다. 

첫번째 질문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란 질문인데,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 어찌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고 묻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때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단들이 항용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식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번역이 잘못 되었나하고 원문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제대로 성경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에서 얻는다 라는 동사로 κληρονομεω 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물려받다, 얻는다,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κληρονομησω 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제1과거형으로 읽은 것 같습니다. 

어찌됐건 구원을 받는다는 용어는 사도 바울 역시 세 가지 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과거형은 물론, 구원 받는다는 현재형,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미래형이 그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만에 하나 지금 율법사의 질문을 받고 있는 주님 입장에서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듣고만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을 반드시 지적하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질문자체만을 보면 타당해서 그 대답을 하신 것인데, 

이제 와서 질문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찰이거나 심각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더욱 황당한 주장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은, 더욱 더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웃이 누구인가로 확정되는 순간에, 이웃이 아닌 사람들이 곧 바로 들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으로 구별짓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이웃 아닌의 경계를 타파해야 한다는 신기한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이 세 사람들 중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율법사의 입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대화를 맺습니다. 

설교자의 주장대로 이웃과 이웃 아닌 그 경계를 없애자는 것이 본문의 뜻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 대답하셨으니,

이 어리석은 말 장난에 놀아난 주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설교자는 이렇게 성경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 말씀을 비틀어서 혼란스럽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의 심리 상태를 뒤흔들듯이 말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도록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성경말씀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평범하고 틀에 박힌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신학용어를 사용하거나 성경 언어를 인용하면서 

본말이 전도되는 그런 해석을 즐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전달할 의무를 가진 것이 설교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성경말씀이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돼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 강단의 비극이 있습니다. 

차라리 이런 설교보다는 해석이 전혀 없이 성경본문만 인용하는 조 아무개 목사가 더 낫습니다. 

그러니 이제 성경말씀을 비틀고 왜곡하는 그런 저주받을 설교는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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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주장을 펴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누구든 자신에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회가 주어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성서 언어가 선포라는 의미를 가진 케류그마라는 말입니다. 

동사는 케뤼소입니다. 물론 선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청중들의 호 불호를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를 일컬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대사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를 들어보면 가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유명 목사님이란 분들의 설교를 여러 차례 모니터링 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자기 말 혹은 자기 주장을 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첫째는 성경이 말씀하는 주제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령 대림절 둘째 주일의 복음서 본문 눅 3:1-6을 설교한 어느 목사님은 

당신의 광야는 어디인가? 라는 주제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 초점을 두었는데, 

본문에서 광야는 본문에 나오는 한 개의 단어에 불과할 뿐 전체를 말하는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처음부터 본문의 요점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일입니다.

설교자의 고민은 성경 본문이 말씀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오늘의 청중에게 그 요점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본문의 요점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설교자를 흔히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최대한 힘써야 합니다. 

만일 주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낸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 지는 뻔합니다. 


설교자가 말씀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제게 들려주십시요.


만일 이런 유혹에서 벗어난다면, 

청중을 설득하는데서 조금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예 자기 얘기를 하려거나 딴지를 부린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아닌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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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긴 하지만 설교를 모니터링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온통 비판적인 마음으로 설교를 경청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깨달음 중의 하나가 초점이 없는 설교의 문제점입니다. 


흔히 강해설교에서 받는 큰 충격 하나는 한 편의 설교에 초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그리고 문장을 구성하는 문법에 치중하다 보니까,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게 되고, 하나의 초점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마침내 머리속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설교자는 설교 말미에 바르게 살자거나 

모든 종교인이 무난하게 사용하는 권선징악 정도로 얼버부리고 마는 경우가 됩니다. 


저는 1996년 봄부터 2015년 2월말까지 20년간 어린이 설교를 했습니다.

어른을 따라 나온 어린이들 역시 예배자로 참석했기에 

그들에게도 설교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 설교 앞 두번째 순서에 어린이 설교 시간을 넣은 것입니다.

물론 그 주일의 설교 주제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5-7분의 설교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제가 내린 결론은 어린이 설교가 어른 설교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입니다.

적어도 그 주일의 설교에서 무엇이 강조될 것인가를 소개했거나 암시했다고 말입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고 합시다.

먼저 저는 제목을 두번 정도 따라서 말하게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다섯살 된 여자 아이에게 "너의 친구는 누구야?" 라고.

또 다른 네살짜리 남자 아이에게도, 그리고 열살 짜리 여자 아이에게도. 

그리고는 "그랬구나. 좋은 친구들을 가져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라고 칭찬합니다.

그리곤 친구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래 사귀는 친구와 그렇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오래 사귀려면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내 생각이나 내 기분과 다를 때인데, 그 때는 먼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화를 내거나 "싫어!"라고 말하기 전에, "기다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기다려!" 라는 말을 마음 속에 들려주는 분은 예수님이야. 라고 전합니다. 

"싫어!"라고 말하기 전에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기다려!" 그래요.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좋은 이웃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설교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웃을 대하는 마음 하나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른 후 이어지는 어른들의 설교에서는 이웃에 대한 마음 가짐을 확보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설교는 귀로 듣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 주제나 중심점이 단순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여러 주제를 뒤섞어서 비빔밥을 만들면, 무엇을 들었는지 어리벙벙하게 되고 맙니다.

바로 이런 약점 때문에 설교 후에 우리의 정신과 생활에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좋은 얘기를 늘 듣긴 듣는데, 구체성도 없고, 실천을 위한 동기부여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는 얘기처럼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내 아이가 알아듣고 있을까?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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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로 서 있을 때와 청중으로 설교를 들을 때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설교가 잘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삼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가령 전달하는 설교는 모니터를 해 주기 전에는 그날의 분위기 여부로 짐작만 할 뿐이지만, 

설교를 들을 때는 화가날 정도로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강의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그렇습니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을 텍스트로 삼아야 합니다. 

이에 반해서 강의는 반드시 텍스트가 성경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의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주제를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는 중심점을 무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말하고싶은 주제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려는 주제에 집중 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강의자 역할을 한다면 그는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러 나온 청중이 화를 낼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분노할 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내용보다는 

설교자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점은 설교자나 회중의 관심사와는 너무 다를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회복과 자녀 출세가 화급한 일인데,

오히려 나보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해는 되면서도 선뜻 응하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성경의 중심점과 설교의 중심점이 일치하는 지 여부를 체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일 설교문을 작성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문하면 됩니다.

자신의 설교 제목이나 중심점을 확인한 다음,

이것이 오늘 성경의 중심점인가 하고 물어보면 됩니다.


가령 5천명을 먹인 일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B 목사님이 "어린 아이와 5천명이 배부르게 먹은 만찬"이라고 제목을 잡았다고 합시다.

본문에 어린 아이도 등장하고, 5천명이 배부르게 먹은 것도 분명합니다. 

이럴 때 B목사님은 체크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가 5천명을 배부르게 하였다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교육이라는 수단으로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로써는 아주 잘못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의 목적은 어린 아이의 5병 2어를 통해서 주님께서 배고픈 5천명을 먹이셨다

고 말씀하시는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습니다만, 

설교자는 설교의 텍스트인 성경을 몇 차례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점을 오늘의 회중들에게 설득력있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인위적으로 감동을 주거나 흥미를 끌게 하려고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내용을 가정이라는 추론을 달아서 흥미를 유발해서도 안 됩니다.

때때로 이런 가정이나 추론이 기정 사실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5분 강의는 성경의 중심점과는 전혀 다른 설교의 중심점을 설교해서는 안 되겠다는 내용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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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포함해서 우리 기독자들에게서 가장 취약한 점이 천국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열심히 설교하고 관심을 끌게하지만,

천국에 대해서는 그 윤곽이나 형체만 언급할 뿐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너무도 많은 기독자들이 천국을 사모하는듯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기피하는 현상이 사실입니다.

그 하나가 천국이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새 세상을 노래하거나 죽음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천국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주 짧은 한시적인 곳이고 목표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천국에 관해서는 성경에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오용되고 있고 오해와 곡해속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 

누구보다도 주님께서 천국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도 귀등으로 흘려듣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천국의 희미한 현상만을 보여주는 요한 계시록이 전부인줄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루터와 칼빈은 계시록은 환상의 기록이어서 이현령비현령으로 주석이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천국소개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한 예로 마 20:1-16을 들 수 있습니다.

"포도원 일꾼과 품삯"이란 표제어를 붙이고 있어서, 세상 이야기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로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한 순간도 이 본문을 읽어내려갈 때 하늘나라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소개하신 하늘나라, 천국은 일하는 나라임을 밝힙니다. 

하루 품삯을 정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데리고 오는데, 

아침 일찍부터 일터로 불려온 사람과 오후 늦게 불려온 사람이 있을 뿐 모두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늦게 불려온 사람은 그 나름으로 바쁜 다른 일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으로 분류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품삯을 계산할 때의 낯선 풍경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는데 맨 처음에 온 사람과 똑 같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래서 일꾼들이 불평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마 여기에서 일꾼들의 불평은 우리들 세상 일꾼들의 얘기일 것 같습니다. 


천국의 시민들은 그럴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천국은 공평무사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한 만큼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를 혼동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이 일하면 많이 받아야 정의롭다는 세상의 가치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치체계와 정의개념은 세상과 많이 다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겉 모습 뿐입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온갖 권모술수를 다 쓰면서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면 그게 전부인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인간의 마음 속을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천국에서는 세상 가치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은 성경말씀의 중심 주제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찾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우선순위에서 맨 나중으로 돌려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중심주제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여러 가지 주제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눅 16:19-31) 흥미로운 천국 이야기이며,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을 묶어놓은 마 13:10-52도 천국을 공부할 좋은 재료입니다. 


천국의 가치와 질서를 세상 것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낭패가 생긴다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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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팩트(fact)라는 단어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명 "커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흥미위주의 청문회 질문에서

팩트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 때문인지 국민들도 팩트라는 말에 주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설교자들에게서도 이 팩트가 매우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팩트를 제대로 모르거나 실은 알려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보통 아닌 문제가 생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가게에는 반드시 걸려 있는 액자가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이 액자를 많이 사서 교인들의 집들이용 혹은 개업선물로 드렸습니다.

제가 자주 찾는 기독서점이 을지로 6가에 있는데 사장님께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팔린 집들이 선물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예상대로 앞서 말씀드렸던 바로 그 액자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이 말씀이 개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 적절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미미합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창대해 지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이 구절은 안성맞춤이고 최상의 신의 한 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사용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장 개업하는 교우의 사업체 만이 아니라, 설교에서도 조심조심해야 할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언제 어떤 의도에서 그 말을 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언어활동이란 단순히 표현된 말 그 자체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과 그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는 그 진정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이 말을 한 장본인은 하나님도 욥도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꾸중하고 있는 욥의 친구들 네 사람 중 하나인 빌닷이라는 사람입니다.

빌닷과 함께 등장하는 엘리바스, 소발 그리고 엘리후도 장황한 말로 욥을 비난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나 주장이 욥기의 신학에서 부정되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네 친구들은 욥의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꺾어보려고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는 욥에게 대못을 치는 비아냥의 뜻으로 사용한 말이라는 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는지는 몰라도 진정한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욥이 성공한 인물이었으니까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시기와 질투심이 항상 그들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차에 

마침 욥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옳다구나 잘 됐다 하는 심정으로 욥의 심장에 대못을 박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의도는 아주 못된 심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흔해빠진 속담 한 구절을 찾아내어 욥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괴롭히는 말을 두고, 아무리 미화해도 그 동기가 악하다는 뜻에서 곤란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축복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말로 이해해야 옳은 것입니다.


둘째는 고도의 심리전법으로 욥에게 능지처참의 형벌을 주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하는 최고의 형벌로 능지처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오르게 하는 것처럼, 

서서히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 죽게하는 형벌인데, 

살아 있는 사람의 팔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심장을 도려낸 후에 목을 자르는 형벌이 그것입니다.

욥은 지금 말로 다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형벌을 받고 있는데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해서 더욱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국에 친구들마저 비아냥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현실감이 전혀 없는 말로 욥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말려죽이려는 그런 심보를 들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빌닷의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말하는 이의 의도가 분명한 이상, 

이 구절을 더 이상 개업축하나 어떤 축원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문자 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의 죄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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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가 예배를 드린 어느 감리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출타하셔서 대신 설교하게 되었다는 분이 택하신 본문은 눅 10:25-37의 말씀이었습니다. 

제목은 <영생과 자비> 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영생을 얻기위해 할 일을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성경에 무엇이라 말씀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 때 율법사는 주저함없이 <쉐마교리>를 외우듯 대답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고 말입니다. 

사실 이 쉐마교리는 아주 오래 전에 십계명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교사가 되물은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웃을 모르고 있는 그 율법사와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서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의 주제는 우리의 이웃이 누군가를 찾는데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는 엉뚱하게도 룻기의 얘기를 장황스럽게 꺼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모압지방으로 피난을 간 나오미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세 남자가 죽고 세 과부만 남았다는 얘기도 이어집니다. 


잘 아는대로 다시 유대에 풍년이 들어 돌아오려고 하는데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그들을 친정인 모압 땅에 남겨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한사코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오게 되고,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의 첩이 되어 훗날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와 사마리아 사람을 연결시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기업무를 자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이리저리 뜯어 맞추고 있었습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말은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의미보다는, 

과부가 된 사람의 남편구실을 하게 된다는 아랍의 수혼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청상과부의 미래를 열어준 것에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낳아줄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됨과 룻의 남편 역할을 하는 것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당한 설교를 듣고 우리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이런 설교를 하고 있구나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제목은 왜 그렇게 잡았는지 결론도 엉성합니다. 그리고 아멘만 유도합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 귀한 자리에서 헛소리만 했던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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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설교에 대해서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고백하고 싶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라는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십사 합니다. 


1. 성경구절은 많이 인용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Proof Text였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자신의 설교를 모니터링 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중요하다 싶은 주제를 적어보았습니다. 

    성경구절로 엮어가는 겁니다.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증명자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설교입니다. 


2. 축복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어선지, 교회성장에 초점을 둔 설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멘트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끌고 오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한 이들의 복받은 삶이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목적은 세속적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입니다. 

    그러니 방향성이 한참 빗나간 나쁜 설교입니다.


3.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는 설교엔 반드시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 인간이 설교자 자신일 때 구역질이 나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의 임무를 가졌을 뿐입니다.

   인간의 업적만을 늘어놓는다면 참으로 나쁜 설교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배후에 계심을 반드시 얘기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저 역시도 그런 설교자였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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