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저는 성경 읽기에 공을 들여야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대충 훑어보고 자기 주장을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에 한국의 유명 설교자들을 한 칼에 베어버린 설교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성결교회의 김용섭목사라는 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설교는 역사비평에 의존한다 했습니다.
당연하고 당연한 말입니다.
역사 비평을 길게 설명해야 하겠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Text in Contex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삶의 자리를 갖고 있으며, 또 다른 독특한 삶의 자리를 가진 청중에게 전해야 합니다.
해석이라는 말은 처음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오늘 청중들의 삶의 자리로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역사 비평적 자세가 아닌 진공상태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위험한 문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눅 10:27-37을 본문으로 한 어느 설교자의 설교를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제목은 "선한 이웃으로 살자." 였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본문입니다.
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율법사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이라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저의 설교자는 대뜸 이 두 개의 질문이 잘못돼 있다고 폭탄 선언을 하였습니다.
첫번째 질문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란 질문인데,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 어찌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고 묻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때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단들이 항용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식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번역이 잘못 되었나하고 원문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제대로 성경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에서 얻는다 라는 동사로 κληρονομεω 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물려받다, 얻는다,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κληρονομησω 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제1과거형으로 읽은 것 같습니다.
어찌됐건 구원을 받는다는 용어는 사도 바울 역시 세 가지 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과거형은 물론, 구원 받는다는 현재형,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미래형이 그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만에 하나 지금 율법사의 질문을 받고 있는 주님 입장에서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듣고만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을 반드시 지적하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질문자체만을 보면 타당해서 그 대답을 하신 것인데,
이제 와서 질문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불찰이거나 심각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더욱 황당한 주장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은, 더욱 더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웃이 누구인가로 확정되는 순간에, 이웃이 아닌 사람들이 곧 바로 들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이웃과 이웃 아닌 사람으로 구별짓게 되는 문제를 낳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이웃 아닌의 경계를 타파해야 한다는 신기한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이 세 사람들 중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율법사의 입으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으시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대화를 맺습니다.
설교자의 주장대로 이웃과 이웃 아닌 그 경계를 없애자는 것이 본문의 뜻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 대답하셨으니,
이 어리석은 말 장난에 놀아난 주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설교자는 이렇게 성경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 말씀을 비틀어서 혼란스럽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의 심리 상태를 뒤흔들듯이 말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도록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성경말씀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은 평범하고 틀에 박힌 설교자가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신학용어를 사용하거나 성경 언어를 인용하면서
본말이 전도되는 그런 해석을 즐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전달할 의무를 가진 것이 설교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성경말씀이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돼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 강단의 비극이 있습니다.
차라리 이런 설교보다는 해석이 전혀 없이 성경본문만 인용하는 조 아무개 목사가 더 낫습니다.
그러니 이제 성경말씀을 비틀고 왜곡하는 그런 저주받을 설교는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자를 위한 5분짜리 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자가 극복해야 할 유혹들 2. (0) | 2018.12.10 |
---|---|
초점을 흐리게 하는 설교를 지향하려면. (0) | 2018.03.12 |
설교와 강론(교육)의 차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0) | 2018.01.28 |
천국에 대해서 묵상하기. (0) | 2017.10.12 |
조심해야 할 구약 인용에 대해서. (0) | 2017.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