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신분에서 설교를 듣는 회중의 신분으로 바뀐 지 18개월이 되어간다.

물론 그 18개월 동안에도 쉬지않고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중의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축복을 누린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난 40여년 동안 목청을 돋구어 외쳤던 설교가 

너무 잘못되었던 점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 하나이고, 

지금도 여전히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는 율법과 복음을 설교에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성경에는 율법과 복음의 말씀이 가득하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는 율법적인 설교가 대세였다. 

그래서 성경말씀과 공자님의 말씀을 자주 비교하였다. 

기독교회가 윤리 도덕적인 종교라는 것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런 율법적인 설교가 기독교회의 설교의 전부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고등종교라고 한다면 어디든 윤리 도덕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이런 종교들과 분명히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성경을 말씀한다. 


율법이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마땅히 해야 하고 해선 안 되는 규범을 가리킨다.

가깝게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웃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로 넓혀질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한 인간으로써 힘써 지킬 일이고 행할 일이다.

문제는 이런 율법적인 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고 말이다.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셨다.

작은 욕설 한 마디로 사람이 죽을 수 있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것 만으로도 간음한 것이 될 수 밖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복음이 절실하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이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십자가를 지신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율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최대한 율법적 노력과 열심을 품도록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율법적 의를 강조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복음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의가 커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은 무력해 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율법적이다. 

인간이 노력하면 만사형통할 것 처럼 야단법석이다. 

그렇게 힘주어 역설하면 할 수록 그리스도의 공로나 하나님의 사랑은 찾을 수 없다.

내 귀엔 이런 율법적인 설교들로 한국교회의 강단이 풍성한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언제쯤이면 하나님의 복음이 제대로 들려질 수 있을런지 

그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

오늘도 복음이 들려지는 소박한 강단을 그려본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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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본문을 텍스트(Text)라고 할 때, 

그 본문을 말하게 된 배경을 콘텍스트(Context)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주석을 할 때는 다시 말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소위 무엇을 의미했는가(What it meant?) 를 찾고자 할 때는 

본문을 사용하던 사람들의 언어와 용법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본문을 사용하는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어떤 배경에서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지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경우는 또 다른 콘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의 콘텍스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무엇을 뜻하는지(What it means?)를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낯선 아프리카인 목사님이 한국에 설교하러 왔다고 가정합시다.

그 분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의 현대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기때문에, 

다시 말하면 설교자 자신의 삶의 정황만을 생각하며 설교를 할 경우,

같은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전혀 낯선 방향으로 설교가 진행될 수 밖일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의 콘텍스트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100명의 청중은 제 각각 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을 테니까

100가지의 안테나를 가지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100명이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가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중의 상황에 지나치게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가령 입시생들의 부모님을 위한 기도회를 가진다고 가정합시다.

솔직히 저는 이런 모임 자체를 가져본 바 조차 없습니다만, 

이럴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합격만을 기도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 상급학교를 가려고 하는지, 

그동안 얼마나 충실하게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과정이 없이 

결과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인 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비인격적인 인간의 욕망에 끌어들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는 분명한 이유를 가르쳐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 환영받는 일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게고,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찾아서 

오늘의 청중에게 들려줌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돕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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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에 설교 연구서인 월간지 [그 말씀]에서 루터교회의 설교의 특징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마침 각 교파별 설교의 특징을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출판되었던 다른 교파의 특징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교파의 신학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필자의 설교 성향을 진술하는 내용이었고, 

다행히 제가 소개하려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루터교회의 설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물론 이런 주제로 누군가가 진술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그 때 서 너가지로 분류해서 썼던 것 같습니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보면, 

율법과 복음의 균형적 적용, 그리스도 중심적 내용, 

그리고 교회력에 따른 설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란 무엇일까요?

설교를 하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심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연결 내지는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청중으로 하여금 그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빠진 설교가 된다고 하면, 

그 설교는 한낱 교양강좌나 처세술 강연에 불과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그리스도 중심이란 주제를 늘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루터교회의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분이라면 누구든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했다고 하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한 설교는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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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파는 교회 지도자가 아예 없습니다. 

모두가 똑 같은 성도입니다. 

그 배경에는 성경을 해석할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쓰인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성경 언어를 때로 배울 필요도,

해석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통전성을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뿐 입니다. 


여기엔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성경이 쓰여진 2천년 3천년 전의 시대 상황을 무시할 수 없는데도, 

그래서 그 멀고 먼 시대적 차이를 건널 뛸 수 없음에도, 

그 먼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던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참 용기있고 대단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이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걸 직업으로 일하고 있는데, 

한 달만 게으름 피우면 20세기 사람이 되고 만다합니다. 

하루 하루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양반 상놈으로 구분돼 살던 조선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해석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자리, 소위 sitz im leben, life situation에 대한 배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2천년 전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말씀을 이해하는 형편은 천차만별입니다. 

한 설교를 수 백 수 천명이 들어도 이해하는 정도는 제각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앞에두고, 성경의 시대를 해석하고,

현대의 청중이 사는 시대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을 배울 이유가 충분합니다. 

이런 신학교육이 부실한 이들일수록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라고 합니다. 

유명 설교가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너무 많은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분들의 설교가 은혜롭다고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반증합니다. 

전혀 고민하지도 공부도 하지 않고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는 분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이해라고 가르치는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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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왜 설교를 해야 하는가?


젊은 목사로써 회의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느 주부의 말처럼 밥을 하고 돌아서면 또 끼니를 준비해야 한다는 게 멍에처럼 짓누른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 설교를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절실함이란 그리 자주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 게 언제나 커다란 벽을 마주한듯 힘들었습니다. 

윤동주가 어느 날 시가 너무 쉽게 써진다고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듯 할 순 없을까?

그런 꿈같은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울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성처럼 깨달음이 머리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에서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성경 본문에서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우리 인생들이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최상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야 하고, 

실감하도록 해 주어야 할 준엄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찾아내는 작업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보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랑을 깨닫도록 지혜를 주시는 분을 바라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겠다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겠다고, 

주님의 말씀으로 감동 감화를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짤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엎드리라고. 

그리하면 조용히 깨우침의 은총을 허락하신다고 말입니다. 


어느 날 부터 설교하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말의 유희를 즐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설레고 기뻐하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통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엄청난 일에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평화 !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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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회중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고 싶어합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고 그리고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선한 목적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다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방법 또한 건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인위적으로 감동을 주려고 말고 오히려 건조하게 말씀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에 가끔 방학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학생회나 헌신예배 설교를 하신 

한 대학생 형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지금 미국에 사시는데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 아닌데도

그 분의 설교는 늘 가슴을 흔드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선택하신 단어나 음정이나 표정이 작정한 감동표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드라이하게 말씀의 정곡을 짚었고 자신의 깨우침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멋있고 신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목사님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둘째는 말씀을 대하는 고민하는 진지한 자세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강단은 설교자들의 흐트러진 모습이 자주 비춰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부흥회의 여진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보다는 예화에 비중을 더 두는 것도 그 한 원인일 수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이 본문을 읽을 때 그 말씀의 중심점에 닿으려고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고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식상할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그런 범주에서 멈춰 서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말씀에 대해서 고민하는 설교자라면 회중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여러 각도에서 쳐다보는 노력이 없는 것도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셋째는 끝까지 진실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얼마전 사순절의 묵상이라는 주제로 좋은 글들이 제 카톡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인용을 하고 싶어 글을 올린 친구에게 자네 이름으로 사용해도 좋으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네 이름으로 올려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소설과 다른 것입니다. 희망사항도 아니고 무용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엎드리는 일이고, 두 손을 들고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회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전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가슴이 뜨거운 사람인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의 눈빛이나 말 소리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 움큼씩 뚝뚝 떨어질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셨고, 

그리고 듣는 회중의 마음도 흔들실 것이 분명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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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은퇴를 하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엉터리 설교를 해 왔던 저의 과거사를 되돌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기회가 많다보니까 배운 깨우침입니다. 

너무도 많은 설교자들이 유혹의 덫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덫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통해서 설교자가 자기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저질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경우이고, 그리고 가장 흔한 설교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설교에서는 성경구절을 너무 많이 인용함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학 용어로는 이런 성경인용을 proof text 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뒷받침하는 전거자료(典據資料)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경우 그 설교자는 성경말씀을 기초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트리고자 성경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 설교자들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몸통을 무시하고 곁 가지 하나만을 붙들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했다는 많은 말의 중심 흐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 많은 말 중에서 한 마디 말, 그게 욕설이라든지, 비난했던 말만을 

골라서 침소봉대, 대서특필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설교자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고, 

함께 속내를 터놓고 얘기하기에는 매우 위험한 분이라 하겠습니다. 


세번째는 논리적인 비약을 상용하는 경우입니다. 

매우 흔한 설교자의 유혹의 덫이기도 합니다. 

가령 어떤 설교자는 기도 만능이라는 설교에서 

기도만 하면 만사형통한다는 식으로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조건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산삼이 잘 보인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스무 세 뿌리도 캐고, 

또 어떤 때는 열 다섯 뿌리도 캐서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식입니다. 

과연 그런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우리가 바라는 식의 해답만이 정답이 아닌데 말입니다.


네번째는 성경용어의 정확한 뜻을 잘 모르는 경우입니다. 

믿음이나 복음이라는 용어나 은혜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런 용어들을 성경에서는 무슨 뜻으로 말씀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거나, 혹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범위에서 그 용어를 사용할 수 밖입니다. 

그래서 웃지못할 해프닝을 얼마나 자주 벌이는지 모릅니다. 

가령 복음이라는 용어의 일반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꼬인 문제를 푸는 방법이 주어졌을 때 이를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만,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죄와 죽음아래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을 선포할 때

이를 복음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극복해야 할 유혹들을 아는 것 만으로도 희망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전할 날이 올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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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제목은 반드시 본문의 중심사상에서 나와야 성경적이고 올바르다 할 수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 봅시다. 


<오병이어 기적 일화>는 공관복음서는(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물론 요한복음서까지(6:1-15) 모두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본문의 중심사상을 말한다면,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단본중을 그대로 설명하고 전할 때, 그것은 성경 교육에 해당된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중심사상으로 고쳐야 합니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의문대명사를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무엇을 이란 질문은 진리나 의미 등을 찾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은 방법이나 수단을 찾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왜 라는 질문은 이유나 뿌리 등을 찾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단설중으로 바꾸기 위해서 이것들을 모두 다 대입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또는 의미상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생깁니다.

그럴 때는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라고 할 수 있고, 

"오병이어 기적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로, 

그리고 "주님께서는 왜 오병이어 기적을 말씀하시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질문형식의 제목을 꼭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오병이어 기적 일화가 가르치는 의미" 라거나,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까닭." 으로,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오병이어에 동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복습하는 말씀입니다만, 

단본중은 성경 본문을 요약한 것이기에 성경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밝히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설중은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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