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신분에서 설교를 듣는 회중의 신분으로 바뀐 지 18개월이 되어간다.
물론 그 18개월 동안에도 쉬지않고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중의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축복을 누린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난 40여년 동안 목청을 돋구어 외쳤던 설교가
너무 잘못되었던 점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 하나이고,
지금도 여전히 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는 율법과 복음을 설교에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성경에는 율법과 복음의 말씀이 가득하다.
1930년대에서 1960년대는 율법적인 설교가 대세였다.
그래서 성경말씀과 공자님의 말씀을 자주 비교하였다.
기독교회가 윤리 도덕적인 종교라는 것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런 율법적인 설교가 기독교회의 설교의 전부냐 하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고등종교라고 한다면 어디든 윤리 도덕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이런 종교들과 분명히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성경을 말씀한다.
율법이란 사람이 주체가 되어 마땅히 해야 하고 해선 안 되는 규범을 가리킨다.
가깝게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이웃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로 넓혀질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한 인간으로써 힘써 지킬 일이고 행할 일이다.
문제는 이런 율법적인 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고 말이다.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셨다.
작은 욕설 한 마디로 사람이 죽을 수 있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것 만으로도 간음한 것이 될 수 밖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복음이 절실하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이다.
복음이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말씀하는 내용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십자가를 지신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율법으로 시작할 수 있다.
최대한 율법적 노력과 열심을 품도록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율법적 의를 강조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복음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의가 커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은 무력해 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율법적이다.
인간이 노력하면 만사형통할 것 처럼 야단법석이다.
그렇게 힘주어 역설하면 할 수록 그리스도의 공로나 하나님의 사랑은 찾을 수 없다.
내 귀엔 이런 율법적인 설교들로 한국교회의 강단이 풍성한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언제쯤이면 하나님의 복음이 제대로 들려질 수 있을런지
그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
오늘도 복음이 들려지는 소박한 강단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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