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의 중심주제를 그대로 설교하는 경우를 성경공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내용을 공부시키는 일이라 말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설교 시간에 성경공부를 시키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렇다면 설교란 무엇입니까?

설교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통해서 특별한 삶을 살고 있는(context)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전 항목에서 취급했던 단본중을 가지고 단설중으로 넘어가는 훈련을 하겠습니다. 


1. 요한복음 13:1-20의 단본중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선생 예수님."으로 정했습니다. 

   이 주제를 새로운 오늘의 회중에게 전할 설교의 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단본중과 마찬가지로 본문 중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과 상관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선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찾아낸 단설중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 라고 정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서로 발을 씻기라고 명하시면서

그것이야말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발을 정성스럽게 씻기듯 서로를 섬기는 일이란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2. 요한복음 12:36-50의 단본중을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로 정했습니다.

   이 주제를 오늘의 회중에게 전할 설교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믿지 못하게 하셨다 했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내쫓김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찾아낸 단설중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이었습니다."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우리 자신의 의지나 결단 혹은 지식의 산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고 선물이었습니다.

누구나 가질 수 없고,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가장 큰 은총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도 없고, 

다른 이의 믿음을 홀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믿음이기에 모든 고난과 역경을 해치고 수고의 멍에를 짊어지는 까닭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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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대학이나, 중국, 몽골, 베트남의 신학생들에게 설교의 실제를 수 차례 강의한 결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서 저마다 다른 주제를 발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잘 된 일이라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같은 본문을 시차를 두고 다시 설교하게 되었을 때, 

전에 했던 설교문을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까닭은 같은 본문인데도 시공간의 차이 때문에 

전혀 다른 눈으로 주제를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훈련을 해 봅시다. 


1. 본문 요한복음 13:1-20의 단본중을 찾아봅시다.

   단본중을 찾기 위해서는 본문을 여러 차례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주제로 말씀하시려는지를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에 따라서 자마다의 주제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제가 찾아낸 본문의 중심 주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선생 예수님." 이었습니다. 

   이 중심주제보다 더 뚜렷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단본중으로 확정짓는 것입니다. 


2. 본문 요한복음 12:36-50의 단본중을 찾아봅시다.

   본문의 내용이 길기 때문에 여러가지 내용이 뒤섞여 있을 때 주제가 무엇인지 찾기 힘듭니다.

   이럴 경우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큰 주제와 작은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혹은 세가지의 주제들을 함께 취급하려고 해서는 매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세개의 주제를 한 설교에서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찾아낸 본문의 중심점인 주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기적사건이나 위대한 말씀 앞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똑 같은 설교를 들었던 회중 중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갖습니다. 

   훌륭하다고도 하고, 형편없다고도 하고 말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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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본중에서 단설중으로. 


저는 설교자들에게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 얘기할 기회가 더러 있었습니다. 

무슨 행운인지 목회자들을 위한 성경가르치기를 정확히 20년동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위한 베델성서 강습회와 신대원생들을 위한 강습회를 인도한 것입니다.

그 취약점이란 게 자신이 사용하는 말의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 용어든 아니면 자신이 자주 쓰는 말이든, 

그 낱말의 사전적인 이해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 강의에 참석한 분들에게 좋은 사전을 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어사전을 50만원짜리(?) 정도는 사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헌 책방에 가면 5만원에 살수 있다는 팁도 곁드렸습니다.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큰 차이가 나는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일에 자신감도 더불어 붙고 말입니다.


왜 이리 사설이 길었느냐 하면, 

단본중과 단설중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단본중이란 본문(text)의 중심점을 짧은 한 줄고 써 보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본문으로 주어진 구절들을 몇 번이라도 읽어서

마침내 그 중심된 주제가 무엇인지를 한 줄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본중이 설교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원래 말이란 말 전체를 파악하려는 맥락적 이해를 해야지, 

단어 하나 아니면 한 줄 말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 이들이 많다는게 현실입니다. 

강해설교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데 문제가 많습니다. 

가령,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1, 2시간 설교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식으로 1년 혹은 5년을 설교했을 때, 

회중의 머리속에는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요?


설교자는 본문의 중심점을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본중만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에 불과한 때문입니다. 


설교가 되려고하면, 단본중을 단설중으로 바꿔야 합니다. 

단설중이란 무엇입니까? 

text(본문)은 성경의 첫 독자들이 읽거나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런 text가 오늘의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러 온 회중에게 적절한 말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context(상황)에 맞는 말씀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context에 맞는 설교의 중심점을 짧은 한 줄로 정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설교자는 자신의 회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시 발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경의 중심점을 설교의 중심점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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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5년간 신약신학을 가르친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기에 설교학 교수님이 사정이 생겨서 

대신 <설교학 개론>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게 시작이 돼서 신대원 학생들을 위한 

<설교의 실제>라는 과목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 유형을 분석하고 

그 분들의 특징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학생들에게 줄 확실한 가이드 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설교 작성법]이었는데, 

제게 눈을 크게 뜨게 해 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설교 작성법]은 두가지 점에서 저를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첫째는 본문을 읽고 한 줄로 중심점을 작성하는 일, 곧 단본중을 찾는 일입니다.

둘째는 그 단본중을 가지고 설교의 중심점을 한 줄로 작성하는 일입니다. 


본문의 중심사상을 깨닫기 위해서는 몇번이고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였다고 한다면,

그 다음으로는 저의 회중들에게 그 하나님의 의도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분명하게 전달하는 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단설중을 작성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발견, 유레카였습니다.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기 위해서는 

단본중과 단설중을 제대로 찾아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설교자들이 단본중과는 너무 다른 제 얘기를 하는 현실에서 

이보다 더 큰 발견 유레카는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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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안수를 받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었습니다. 

그 때 부산 구덕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구덕산 기도원을 자주 찾아가서 

감화력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 유명 설교가들의 설교집을 사서 따라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그 분들의 설교가 제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제 스타일이고 제 취향인 설교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제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남을 따라하는 설교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제게 가장 자연스러운 설교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멋진 설교가 아니라, 바른 설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이 생각하는 감화력과 웅변적인 설교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찾아내

가감없이 그대로 밝히고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때부터 설교를 잘 했는지 못했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설교를 듣는 이들의 호 불호도 그리 마음쓰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긴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이 마음을 꽉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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