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501호 (2008. 3. 22. 토요일).
시편 시 36:5-8.
찬송 22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공부를 위해 도시에서 머물던 때를 빼고는, 평생을 고향 마을에서 보낸 자연의 시인이었습니다. 당시 시골이란 여행을 위한 곳이지, 지식인이 거주하는 공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음을 생각해 보건데,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공부하느라 잠시 런던에 머물던 그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사람들 사이의 고립감이었다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어떻게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낯선 사람으로 살아갈까? 심지어 서로의 이름도 모를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시골 사람으로 돌아가, 자연에 대한 시들을 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냥 그대로 묘사한 듯 한 쉬운 시는,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그런 시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사람들이, 워즈워스의 시를 패러디하기 시작했고, 문학잡지도 그런 소동에 동조해 그런 장난 같은 시들을 실어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구름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이러한 하늘을 보니 얼마나 유쾌한가?” 이렇게 흉내 낸 시도 보이고요. 또 “내가 본 것이 울 새였던가? 비둘기였나? 아니면 갈가마귀였나?” 이렇게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담은 시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즈워드는 그런 패러디 소동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시는 오래까지 남아서 도시 사람들을 위로 할 것이라고, 출판업자들을 다독였다고 합니다.
워즈워스가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조롱당하곤 했던 그의 시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과 뒤 섞이면서도, 내가 가진 소박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하찮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멀리하며 살아왔다면, 그것은 그대 덕분이다. 그대 바람과 요란한 폭포, 바로 그대 덕이다. 그대 산이여, 그대 덕이다. 오, 자연이여.” 워즈워스는 이렇게 자연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지요. 워즈워스의 친구의 계산에 의하면, 그는 산과 들판을 산책하느라, 평생 28만 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다녔을 것이라고 합니다. 워즈워스의 표현대로 라면 그 긴 시간은, 하찮은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걸러내는 시간이기도 했겠지요. 그렇게 긴 산책이나 마음의 여유를 통해, 불순물이 걸러진 워즈워스의 마음은, 자잘한 돌멩이 몇 개로 해 쉽게 흙탕물로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이 받는 비난의 돌멩이가 우리들 마음의 깊이를 재는 도구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8년 3월 6일 방송>
2. 이번 한 주간을 성주간이라고 부르고, 매일을 “구별되다.” 는 의미의 성자(聖字)를 붙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 토요일입니다. 성 토요일의 색깔은 검정입니다. 애도와 죽음을 상징하는 색깔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슬픔과 절망으로 생각하는 죽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한 단어를 골랐습니다. “쉼” 혹은 “안식”이라는 말이 그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카타파우시스(katapausis) 라는 단어인데, “쉼”이나 “안식”은 물론, “멈춘다”, 혹은 “그만 둔다”는 의미와 함께 “끝낸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우리가 땅 위에서 힘쓰던 모든 일들을 멈춘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하던 모든 일들을 그만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단서가 되는 낱말입니다. 저는 새벽 4시가 되면 잠에서 벌떡 일어나 묵상자료를 보내기 위해서 컴퓨터를 부팅합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설교를 준비할 것이고, 책을 읽고, 교인들의 전화를 받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찾아서 집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음악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멘트들을 몇 번씩 되풀이 들으면서 손가락이 녹슬지 않도록 자료를 만들어 둘 것입니다. 이런 일을 매일같이 되풀이 할 것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진력이 나지 않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되풀이 합니다만, 언젠가는 이런 일들을 모두 끝내고 쉬고 싶다는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눈과 귀가 흐려지고 손가락에 작은 경련이 일어나고, 중요한 일들을 도무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올 때는, 아마도 쉼이 빨리 오기를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무덤에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엔 캄캄한 굴속이며, 무서운 생각마저 들게 하는 무덤이긴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곳을 안식처라고 부릅니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상태라는 말이며, 이제까지 하던 모든 일들을 다 멈추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안식이라는 말 속에는, 멈춤이라는 새로운 단계로의 비약을 위한 웅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구리가 스프링이 튀어나오듯 깡충 뛰어오르기 위해 자세를 취하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죽음은 우리들 삶을 멈추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뛰어 오를 준비 자세를 취하는 때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땅의 일을 끝내시고, 하늘로 올려 가시기 위해서 멈춰 서 계시듯, 우리도 죽음과 무덤을 새로운 세계로의 뛰어 올라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말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주님,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 제겐 참 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던가요. 그 안식을 사모하는 것은 아직은 당돌한 생각일까요?
3. 우리 묵상식구 모두에게 부활절 인사를 보내주신 토마스 엥글러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엥글러 목사님은 몇 년동안 저의 교회의 협동목사님으로 수고하셨고, 지금은 필라델피아에서 소수 민족 선교 책임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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