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83호(2012. 7. 21. 토요일).
시편 20:1-3.
찬송 1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가장 큰 특성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 데요. 요즘 매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풍경 속을 걸을 때마다, 땅과 나무에서 고요히 폭발하는 생명력 앞에 살짝 전율합니다. 그들의 생명력을 확인하면서, 새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월든]을 썼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스스로를 직업적 산책자라고 했을 정도로 산책을 즐겼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4시간은 걸었는데요. 볼 일이 있어 해가 저물 때까지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몸이 녹슬어 버리는 것처럼 괴롭다. 이런 하소연을 했을 정도였지요. 그는 그렇게 많이 걸었지만 빨리 걷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을 서재삼아서 낙타처럼 사색을 즐겼으니까요. 또 랭보처럼 걸어서 멀리 떠나지도 않았어요. “이미 가 봤던 장소가 시마다 철마다 얼마나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는지, 사는 곳에서 발견해야 할 장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간 평생인 70년 동안 그 풍경과 완전히 친숙해 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아마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산책길에 세상사에 대한 근심걱정이나, 이런저런 잡념은 동일시키지 않고, 오로지 그 길에만 충실했기 때문이었지요. 이렇게 산책이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기관들이 습관적으로 반복했던 것들은 닦아내고, 새로운 사용법을 발견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니며,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로우 뿐만 아니라, 룻소 칸트 베토벤도 매일 걸었다고 하지요. 걸으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글로 그리고 음악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혼자 걷는 것을 원칙으로 했어요. 동반자가 있으면 의사소통의 의무를 지니게 되면서 자유와 고독을 잃어버린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다비드 르 부루퉁은 [혼자 걷기예찬]이라는 산문집에서 혼자 걷기의 침묵에 대해서 이렇게 씁니다. “그 침묵은 지금이 껍질을 벗는 한 순간임을 말해준다. 그 껍질 벗음을 통해서 우리는 현상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게 되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며, 내적인 통일을 기하여, 어려운 결단의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돋아난 쓸데없는 곁가지들을 쳐내고, 그를 다시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려 놓아서, 운신의 폭을 넓혀 준다. 그리하여 그가 몸부림치고 있는 일터를 말끔히 청소해 놓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소란과 일상의 근심걱정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그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축적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서 혼자 걷기, 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4월 24일 방송>
2. 아랍 세계는 수혼법(受婚法/Levite law)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법은 남편이 죽으면 동생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또한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그 남편의 형제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법이기도 합니다.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만, 여전히 지금도 아랍 세계에서는 통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얘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아랍 세계의 사람들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은, 당연히 그런 성경의 역사적인 배경을 잘 검토해서 구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배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두개파라는 사람들은 내세는 물론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수혼법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 얘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맏형이 있다면, 그리고 그 형수가 임신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예수님 당시에는 불임을 미리 알 수 없었음), 당연히 일곱 형제의 아내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부활 후 천국에서 그 맏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이렇듯 문화적인 특수성 때문에 오해할 부분이 참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말라는 바울의 충고도 그런 맥락에서 오해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명쾌합니다. 부활한 다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으며, 천국의 천사들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땅의 인연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도 무방하겠지요? 까닭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뿐 아니라, 폭넓은 새로운 관계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몸과 마음을 가진 존재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몸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비체라고 표현합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시도는 부적절한 것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3. 오늘부터 내일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라는 주제로, 포천의 한 기도원에서 전 교인 수련회에 참가합니다. 주일 늦은 오후에 돌아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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