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15호(2012. 8. 22. 수요일).
시편 27:11-14.
찬송 9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나무 꽃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나무 꽃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말자체도 생소하고, 대나무에서 꽃이 피기는 피나? 이런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나무는 평소에 꽃을 피워서 번식하지 않으니까요. 대나무의 줄기는 땅 위로만 뻗는 것이 아니라, 땅 속으로도 뻗다가 또 옆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러다가 마디에서 뿌리와 순을 틔우는데, 이것이 바로 죽순입니다. 죽순이 자라는 속도는 하루에 1m가 넘을 정도로 아주 빨라서요. 쑥쑥 크는 아이들을 빗대어서 죽순 자라듯이 자란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지요. 꽃을 피우는 가장 큰 목적이 번식에 있고 보면, 대나무의 경우 딱히 꽃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딱 한 번 일생에 단 한번 말이지요. “여기서부터 멀다 캄캄하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 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시인의 <죽편>이라는 시입니다. 대 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는 구절은, 대 꽃을 보기까지 백년이 걸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나무의 수명이 대개 백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대나무는 바로 죽기 전에 꽃을 피웁니다. 한 개의 대나무가 꽃을 피우면, 모든 대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우고 그렇게 일제히 죽음에 듭니다. 이처럼 꽃이 핀 후에 말라죽는 현상을 개화 병이라고 하는데요. 꽃이 피는 병이라니. 세상에 이런 말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대나무와 조릿대 류는 대부분 개화 병으로 죽는다고 하는데요. 죽을 때 한꺼번에 꽃을 피워내는 이유는 뭘까요? 많은 대나무가 한곳에서 오랫동안 번식하면, 땅속 영양분이 부족해집니다. 죽순은 하루에 1m도 넘게 자라니 그만큼 많은 영양이 필요하고, 결국 땅 속의 영양분이 모두 고갈되고 말겠지요. 더 이상 죽순으로 번식하는 게 불가능해 지면 대나무는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써서 꽃을 피웁니다. 죽순대신 씨앗으로 번식하기 위해서, 꽃을 피우고 떠나는 것이지요. 일생에 딱 한번 피어나는 꽃이니, 마지막 촛불처럼 화려할 것 같지만요, 대 꽃은 꽃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푸르기만 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꽃도 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5월 31일 방송>
2.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묻는 것은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주제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공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나, 석가모니와 마호멭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처럼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자취를 남긴 분들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몇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마 16:16), 그 다음이 오늘 세례 요한의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세례 요한의 말은 두 차례나 언급이 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번째는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29, 36절). 이런 말을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라는 칭호를 받는 까닭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죄사함을 위한 속죄양의 개념이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범죄는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데, 그래서 부득불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제도나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제물은 끝없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멈추지 않고 계속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 아니라,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죄 아래서 살다가 죄 아래 죽을 것이고, 그 결과 죄의 심판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이런 우리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원의 행동을 하셨고, 그 최일선에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말처럼, 그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성경의 중심 주제이고, 또한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 우리는 참 평안과 자유함을 가지고 깊은 숨을 쉬며 살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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