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43호(2012. 9. 19. 수요일).
시편 34:19-22.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옛날에 숲속에 홀로 살던 곰 한 마리가, 역시 자기처럼 은둔하며 살고 있던 연예가를 만났습니다. 둘은 친구를 찾던 차라서, 함께 살기로 했지요. 곰은 하루 종일 거의 세 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 원예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이었고요. 곰은 사냥을 나가서 함께 먹을 사냥거리를 잡아 가지고 왔으니, 성공적인 동거생활이었습니다. 원예가가 잠이 들면 곰은 그 곁에 앉아서 얼굴에 앉으려는 파리들을 쫓아 주었지요. 어느 날 파리 한 마리가 원예가의 코에 앉았습니다. 곰이 아무리 쫓아도 날아가지 않자, 곰은 몹시 화가 났고요. 급기야 커다란 돌을 들어서 파리를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원예가도 죽고 말았어요. 이 우습고도 어이없는 슬픔 비극은 [라퐁텐의 우화]에서 곰과 원예가가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사전에서는 욱하다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앞뒤를 헤아림 없이 격한 마음이 불끈 일어나다. 애초에 곰은 파리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냥 쫓아내려고만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쫓아도 도망가질 않아서 욱하고 말았습니다. 앞 뒤 헤아릴 이성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저 파리를 잡고야 말겠다는 격한 마음으로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결과 양식을 구해 와서 먹이고 또 잠든 동안 파리를 쫓아 줄 만큼 알뜰살뜰하게 보살펴 주던 친구를 잃고 말았지요. 주변에 보면요, 스스로 욱하다 성질이다 말하는 사람들의 의외로 많습니다. 또 그로 인한 사건 사고도 참 많고요. 특히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여름철에는 더 하지요. 그런데요. 솔직히 욱하는 성질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단지 그 불끈 일어나는 격한 마음을, 스스로 잘 다스려내느냐, 아니면 그 감정에 휘둘리느냐 차이일 뿐이지요. 차동엽의 [무지개 원리]라는 책이 있는데요. 저자는 그 성질의 해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의 견해로는 이 사람의 진짜 문제는, 그의 경직된 생각에 있다. 즉 생각이 신축성이 없어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집착하니까, 욱하는 성질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먼저 그 사건을 화낼 일로 판단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고쳐먹어서 그 사건을 화낼 일로 간주하지 않으면, 저절로 화나는 감정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생각으로 욱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요. 유난히 쉽게 생각과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 혹은 또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라퐁텐의 우화]에서 곰과 원예가가 만나기 전에, 둘이 은둔자로 살았던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곰은 못생기고 불구라서, 원예가는 바보들과 함께 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지내다가 성질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친구를 찾기로 결심을 한 것인데요. 슬픔이란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그 외로움은 인간을 공격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공격적인 성질의 바탕에는, 어쩌면 인정받지 못한 마음, 사랑받지 못한 마음에 대한 그 슬픔과 외로움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럴 때는 이성이 개입할 여지도 현저히 줄어들게 마련이니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6월 27일 방송>
2.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일 못지않게, 아브라함보다 더 먼저 있었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의 삶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써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대할 때는 분노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이해하는 범주에만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 당시의 그들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부정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은 동류(同類)로 예수님을(48절) 분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이해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오해투성이뿐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복음서가 부활의 빛에서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는 말입니다. 그래서 억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을 인간의 본질이나 근원을 향한 신앙의 책으로 읽지 않는 한, 언제나 오해와 의문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까지는 2천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를 넘나드는 얘기를, 논쟁이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질문을 하는 한, 더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에 주목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 가운데서 주님을 만났다는 예수님의 말씀에(56절) 여전히 어떻게 라고 질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왜 라고 물으시겠습니까? 제대로 된 신앙적 질문을 가지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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