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45호(2012. 9. 21. 금요일).
시편 35:4-8.
찬송 43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끔 이런 상상 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만약에 이 책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으로 시작하는 상상이요. 그 책이 무슨 책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히파티아는 4세기 5세기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강의를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이론을 정립했고, 어떤 강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로스가 히파티아를 이교도로 몰아서 잔인하게 처형하고, 그녀가 쓴 책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이슬람 왕국들의 역사에 대해서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책 태우기 분서와 연관이 없지 않습니다. 이슬람왕조는 고대와 중세의 분서의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요. 1099년 십자군이 장서 3백만 권을 자랑하는 트리폴리 도서관을 불태웠고요. 뒤 이어 침입한 터키 군과 몽골군은,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있던 도서관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모두 수십만 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지요.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는 더 참혹합니다. 마야인들은 고도로 정교한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에스파냐 인들이 마야문명을 뿌리째 뽑으려고, 책은 물론이고 책을 기록한 서기집단까지 철저히 파괴해서, 단 네 개의 두루마니 만이 남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마야 문명은 정복자들의 바람대로, 아직도 영원한 미궁에 빠져 있지요. 도서관을 불태우고 책을 불사르고 책을 쓰는 학자들은 탄압하고. <분서갱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복자들이 현대까지도 흔히 저질렀던 악행입니다. 그리고 고도의 정치 수법이지요. 기록은 기억을 지배합니다. 따라서 기록을 없앤다는 것은 기억을 없애는 것이며, 이후로는 지배자의 뜻대로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학문과 정치가 같은 것이었지요. 학문 따로 정치 따로가 아니라, 책에 있는 대로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는 것, 바로 그것이 정치였으니까요. <분서갱유>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진시황과 항우인데요.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들이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신하들이 공자 왈 맹자 왈 들고 나오니 분통이 터졌을 겁니다. 진시황은 유학보다도 자신의 말을 더 위에 세우기 위해서, 분서갱유를 단행했고요. 얼마 후에 항우는 왕실 도서관에 불을 질러서 수만 권의 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믿었겠지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글의 파급 효과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에서 탈출한 현대에는 글의 파급효과가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요, 책보다 인터넷을 더 많이 보는 시대에, 분서갱유를 가정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분명히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불에 태우는 광경은 아닐 텐데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7월 5일 방송>
2. 사람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보게 되고 말한다고 합니다. 생각이 한 사람의 정신과 삶을 송두리째 지배한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른 생각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릇된 생각이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신념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빗나간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1987년 32명이 집단 자살로 막을 내린 박순자의 <오대양 사건>도 그렇고, 일본의 옴 진리교 그리고 1978년 914명이 희생당한 미국의 짐 존스가 이끈 <인민사원 집단 자살극>을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어떤 신앙에 심취하게 된 사람은,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이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과 유대인들은, 똑 같은 한 사람을 두고전혀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점이 우리를 주목하게 합니다. 눈앞에서 일어난 사실을 두고서도 전적인 신뢰를 하는 마음과 부정하려는 마음이 너무도 대조적이라는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똑똑히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에서 광명을 되찾은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나를 눈 뜨게 해 준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 선지자라고(17절),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유대인들은 그를 죄인이라고(24절) 본다는 점입니다. 어떤 생각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도, 반대로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논쟁은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냐 아니냐로 발전하게 됩니다. 눈을 뜨게 한 사실을 두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소박한 신앙이, 마침내 모든 것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고 당황스럽게 만들어 버림으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30-34절). 오늘 우리가 어떤 믿음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묵상하며 기도할 제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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