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94(2012. 11. 9. 금요일).

시편 46:4-7.

찬송 3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어떤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여겨집니다. 책에서 많이 읽었고, 정치인들 연설에서 자주 들었고, 유행가에서도 가끔 들었지만, 내 입으로 말해 본적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어들의 공통점이 있지요. 사실은 우리가 많이 생각하고 뜨겁게 원하고 꼭 필요로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자유 같은 단어도 그 중 하나지요. 만약에 누군가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철학박사 강신주는 말합니다. “지금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아직 부딪혀 본 적이 없는 것이라고요. 상당히 부조리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유롭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 나는 자유롭습니다 라고 답하면,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요. 아니요, 난 자유롭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되거든요.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자유롭지 않거나 자유를 모른다는 뜻. 결국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했다면, 혹시 그 이유가 자유의 반대를 구속으로 여겨서는 아니었을까요? “나에게는 특별한 구속이 없다. 고로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요. 그러나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닙니다.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의 책 [민통선 평화기행]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볼게요. “자유의 반대는 보통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관성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하지만, 관성은 그렇지 않다. 그게 관성의 무서운 힘이다. 또 사람들이 구속이 외부에서 오는데 비해, 관성은 내부에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관성도 구속처럼 외부에서 오곤 한다. 물건을 사는 손조차도 광고에 반응하는 손이다. 외부에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판단. 여기에 관성의 실체가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자유의 반대 관성. 그리고 또 있습니다. 바로 애착이예요. 애착을 둔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거든요.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막고,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극소수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자처하는데요. 그것이 자유로운 삶일까요?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습니다. “무집착은 이러한 상반된 것들에 영향 받지 않는다. 이들을 이겨내는 길은 이들을 없애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뛰어넘고 일어나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데 있다.” 만약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사랑에 대해서 지극한 이 지점에 이를 수 있을 지도요. 윌리엄 브레이크가 말했지요. “사랑은 언제나 결함에 눈 감고 기쁨을 추구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솟구쳐 마음의 온갖 족쇄를 깨트린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94일 방송>

 

2. 어제 이른 아침 수능을 치르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한 젊은이가 세 번째 수능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자랑처럼 추억하는 것 중 하나는 고교 공부 10년인데, 저 역시 제 자신의 희망사항에 붙들려서 힘겨운 젊은 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나를 향한 하나님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에 눈을 떴다면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능성 혹은 전혀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자신의 희망사항이 절망적이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능성과 잠재력을 꽃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미가가 하나님 앞에서 따져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 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수능에 임하는 젊은이들 자신의 희망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바라는 이웃의 희망사항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희망사항을 묻고 있습니다. 참 중요한 질문이며, 자기 인식을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라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로 무엇을 기대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미가 선지자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의(公義)를 행하는 것, 둘째는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어쩌면 많이 배운 사람들이나 많이 가진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것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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