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31(2013. 3. 26. 화요일).

시편 시 79:1-4.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켜보는 것과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 까요? 지켜 본다 라는 말에 뒷모습이라는 말이 더해지면, 참 애틋해 집니다. 뒷모습을 지켜본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또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야만 가능한 말입니다. 알랭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썼던 한 구절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110일 방송>

 

2.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뜻인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입디까?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곧바로 자기 입장을 움켜쥐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참 딱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소경(시각 장애인)의 눈을 띄워준 예수님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을 버릴 수 없어서,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그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를 묻고 있으면서, 그 마음 바탕에는 그가 죄인인데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처지에서는 그 답답함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의학적으로 고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시신경이 이미 죽어버린 때문입니다. 본문의 소경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범할 수는 없다고 하는 생각에 이르자, 두말할 여지없이 그(예수)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마로 밖에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불거지는 심각한 문제입니다만,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규정이나 전통은 곡해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대표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을 위해서 마련된 날인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인 양 생각하게 되었고, 한걸음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무시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얼마나 다릅니까?

 

3.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을 보내고 계신 교우가 있습니다. 밤이 깊다고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며칠 후에 심방할 예정이었는데, 날짜 하나도 분간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곁에 계셔 주심으로 위로를 삼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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