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27호 (2013. 3. 22. 금요일).
시편 시 78:43-50.
찬송 34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수 사이의 좌우명은 “이유가 있겠지.”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새로 생긴 좌우명이라고 하는데요. 그는 좌절하는 대신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잘 되려고 그러나 보다 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고 정말 그렇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좌우명을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늘 자리 옆에 적어놓고 자기를 경계하는 말.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학창시절에는 그렇게나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던 좌우명을,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에 새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좌우명이라고 하면, 뭔가 그럴듯한 사자성어나 위인들이 남긴 명언을 떠올리지만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꼭 지키고 싶은 것, 바라는 내 모습이 좌우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명이 생긴다는 건 삶의 방향이 생기고,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비춰주는 거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덜 흔들리고 덜 헤맬 수 있겠지요. 퇴계 이황의 좌우명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기에 앞서서, 스스로를 먼저 돌아본다는 뜻인데요. 원래 [대학]에 나오는 말로 조선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즐겨 삼았습니다. 율곡 이이의 좌우명은 청년 시절에는 “먼저 큰 뜻을 가지라.” 스스로 한계를 짓고 포기하거나 만족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무실역행>을 좌우명으로 삼았는데, 실제로 있는 일을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힘써 실행하자는 뜻입니다. <무실역행> 도산 안창호의 좌우명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좌우명이 아무리 훌륭한들, 매일 되새기지 않으면 우습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자리 옆에 써 두라고 했던 건데요. 백범 김구는 좌우명을 하루에 세 번씩 낭송했다고 합니다. 그 구절을 이것이었지요. <금일 아행적 수작후 인정>.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 어지러운 시대에 늘 옳은 길에 서고자 했던 백범의 삶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가하면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코씨는, 갖은 고생 끝에 파리에 와서 작은 아틀리에를 마련한 후에 벽에 이런 글을 써 붙였어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그는 그렇게 불멸의 예술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북미 침략기간에 원주민 부족 연합을 이끌면서 최후까지 저항을 했던, 쇼니족의 대 추장 데쿰세의 연설에는 평생에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문장들로 넘쳐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대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서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이별의 순간을 위해, 고귀한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 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 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말라.”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2월 4일 방송>
2. 이방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라고 할 때, 기분이 몹시 상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유대인의 위상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유대인을 참 감람나무로, 이방인을 돌 감람나무로, 유대인을 원(元)가지로 이방인을 접붙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한, 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꺾으시고 뽑아버리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자긍하지도, 높은 마음을 품지도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때, 향기로운 삶을 살았고,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거나,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여지없이 썩은 냄새를 풍기곤 하였습니다. 아모스의 시대나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그 산 역사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왕 사울과 다윗이 자고할 때 그랬습니다.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끼일 수 있음을 한없이 감사하며 엎드려 살아갈 이유입니다. 너무 부유하지도, 너무 강건하지도, 너무 똑똑하지도 않기를 기도할 이유입니다. 조금 부족하기를 조금 모자라기를 조금 약하기를 기도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3. 젊은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이게 합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질문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 마음들에 가슴 벅차게 하는 기쁨이 그득하기를 빌어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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