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517호 (2013. 9. 28. 토요일).
시편 시 119:78-80.
찬송 5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유대인 수용소 학살과 관련된 보고서를 썼다는 죄목은, 당연히 누명이었습니다. 그녀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니까요. 필적 감정을 받으면 간단하게 해결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필적 감정을 거부하고, 유죄를 인정합니다.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무시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어리석은 선택, 자존심을 지키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10년 동안 책을 읽고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냅니다. 그녀는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세상에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글을 익혔고, 마침내 그에게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다고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지요. 이제는 더 이상 어리석은 자존심을 지킬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편지를 기다렸지만, 그는 카세트테이프만 보냈습니다. 그녀의 자존심이 무너졌고, 무너진 자존심은 절망으로 이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영화 <더 리더>의 원작으로도 유명한 메르나르더 슐링커의 소설 <책읽어주는 남자>에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 한나의 첫 번째 선택은 두 번째 선택은 어리석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선택은 그 소중한 자존심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어서였습니다. 살면서 대부분의 경우, 자존심이란 밥 한 그릇 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키려다 오히려 잃는 것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리기 힘든 까닭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겠지요. 인생이라는 끊임없이 어리석은 자존심을 스스로 비워내는 일.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의 자존심은 지켜주어야 합니다. 타인의 자존심을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인생의 인간관계의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간과한다면, 인생도 인간관계도 그리고 세상도 점점 더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8월 30일 방송>
2. 운명이라는 말, 혹은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입니다. 부부로의 만남이나, 부모 혹은 가족이 되는 일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태어나고 보니 한국인이었다든지, 부모가 가난한 농부였다든지 하는 경우는 선택할 여지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애써서 선택했다는 부부관계 역시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런 말을 쓸 만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물론 주변에 이런 운명적인 관계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국적을 바꾸고, 부모나 부부의 연을 끊고 새 출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또 다른 연으로 묶이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딘가에 묶이는 것은 매 한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는 혼인의 관계를 인연이라는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크고 작은 불만이 있더라도 그대로 지내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불신자인 배우자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중도에 어느 한 쪽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경우인 듯합니다. 여러 면에서 힘들 것입니다. 식사 기도를 할 때라든지, 아이들의 혼사를 앞두고 며느리나 사위를 선택할 때, 난감한 경우가 생길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운명처럼 갈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이라고 못을 박기까지 합니다.
이런 주장은 삶의 모든 국면에까지 연장이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경우든(할례자), 이방인으로 태어난 경우든(무할례자), 종으로 살게 되던 자유인으로 살게 되던, 그 모든 삶의 자리가 주께 속한 삶이라고 한다면, 그 곳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까닭은 그런 삶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불만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경우를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고 충고합니다. 사도 시대에서 볼 때는 그런 경우들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신분(종과 자유자)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프리카나 오지의 나라에서는, 그리고 일부 나라에서처럼 모계 사회에서는 여전히 바꾸기 힘든 형편입니다. 사도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삶으로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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