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638(2019. 7. 20. 토요일).

시편 24:7-10.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쩌자고 그 모든 일을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이는가?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을 건드렸을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16세기의 사상가였던 몽테뉴는 원래는 법관이었습니다. 그런데 20대에 판사가 된 이래 15년 동안이나 계속 말단 판사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지요. 서른여덟 살에는 그 자리에서나마 아예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러자 몽테뉴는 시골에 집을 짓고 그곳 전체를 서재로 꾸민 뒤에,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책은 읽다가 어려우면 그냥 덮어버리고, 글도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곤 했지요. 자리에서 쫓겨난 데 대한 좌절이나 분노를 주체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내면 깊숙이까지 상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독서든 글쓰기든 한껏 평온하고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했던 거였습니다. 그런 평온과 자유로움으로 써낸 책이 바로 <수상록>인데요. <수상록>은 일기를 하나의 독서 장르로 만든 최초의 책이자 최고의 필독서로 꼽히곤 합니다. 그러니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상처 받는 사람이라면, 일기장 맨 앞에다가 이 한 구절을 써 놔도 좋지 않을까요? “어쩌자고 그 모든 일을 그렇게 힘들게 받아들이는가?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을 건드렸을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미셸 드 몽테뉴의 한 마디에 물들어 봅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19. 4. 7. 방송>

 

2. “가장 큰 재난(20-24)”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5-28)”을 읽었습니다. 제가 철이 들었을 때는 한국동란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시골 마을도 불에 타고 파괴된 집들과 함께, 학교 가는 길 가장 번화한 네거리에는 한 두 명의 공비(공산군 유격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속에 남아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의 시체가 가마니 위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찬송가는 <고대가>이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1절 가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대가를 지금 한국 교회는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우선 더 화급한 주제부터 생각하는 때문일지 모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우주적 파국의 날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개인적인 종말이 바로 그 파국의 날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2013년 어느 날 교사인 아버지가 주최하는 가족모임에서 <가족의 행복>이란 주제로 토론이 있었는데 15살 난 남자아이에게 아버지가 속내를 털어놓은 한 마디 말, “너만 공부 잘하면 우리 가족은 모두 행복하다.”는 말에, 그 소년은 나만 없어지면 우리 가족은 행복하겠네요.”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베란다로 가서 투신하였습니다. 2014년 조선일보에 기사화된 실화입니다. 가장 큰 재난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섯 살에서 열 살이 넘을 때까지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휴전이 되고도 3, 4년을 공비토벌이란 싸움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때 비행기 폭격을 피해서 산속 개울에 나뭇가지를 꺾어 걸치고 그 속에서 하루 종일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소금물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면서 말입니다. 그때는 분명 겉으로는 절망감이 가득 차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희망이 더 없이 강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겉으로는 선진국 대열인 3만 불 시대에 접어들고, 사회적 안전장치가 더 없이 잘 마련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절망감과 패배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장애를 비관한 분들은 물론 잘 나가는 중소기업 사장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시절에도 잘 견뎌냈는데 말입니다. 파국은 커다란 전쟁이나, 엄청난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잠깐의 모멸감을 참아내지 못하는 일에서부터 삶의 의미를 내동댕이치는 자신감과 자존감의 결여가 최악의 결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정신력의 빈곤이며 희망 없는 사회라는 비관주의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1960년대 남편 없이 아홉 남매를 떠맡으신 저의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신앙 안에 사는 것이 내 희망이고 기쁨이다.” 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희망인 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