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98(2021. 1. 30. 토요일).

시편 시 127:1-2.

찬송 3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자크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 <연인>의 원작자.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 작가.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쓴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작품에 대한 이력도 이력이지만, 35살 연하 얀 안드레아와의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뒤라스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 질문에 그거야 말로 간단하다 그것은 사랑이다.” 라고 대답했던 인물이죠. 앙드레아는 자신이 느끼기는 했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뒤라스에게 단숨에 매료되어서, 그녀에게 열정적인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뒤라스는 예순 여섯 살에 찾아 온 자신이 무엇을 썼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한 젊은 남자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죠. 그리고 두 사람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항상 서로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35살 연하 앙드레아와 함께 보낸 세월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사랑>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남았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쓴 <이게 다예요> 라는 책에도 남아 있고, 그녀가 죽은 뒤 혼자 남겨진 앙드레아가 그녀와의 사랑과 추억을 그린 소설 <나의 연인 뒤라스>에도 남겨 있습니다. 여순 여섯 살에 만난 31살의 연인, 그 연인과 16년을 함께하고 82살에 47살의 연인을 두고 세상을 떠난 뒤라스. 두 사람의 사랑이 남긴 메시지는, 우리의 영혼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매료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7일 방송>

 

2. “유대인들의 전통(1-23)”을 읽었습니다.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단은 존경할만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이란 오랜 시간 습관화한 무형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에게 있는 좋은 전통 하나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결례의식 중 손 씻기입니다.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식사하기 전에 하는 손 씻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깨끗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기분 좋게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이고, 몸 안으로 나쁜 병균을 전하지 않을 것이기에 마음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깥출입 후에는 손과 발을 씻는 결례 항아리를 마당에 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씻는 전통을 무시하는 모습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목격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전통을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며 주님께 항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논쟁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목적과 수단의 대한 관심사입니다.

    질문의 형식에는 왜 라는 것과 어떻게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자는 본질을 묻는 것이고, 후자는 방법을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질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는 방법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주님은 본질을 떼놓고 방법을 묻는 것은 위선이라고 정의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르반 전통>을 드셨습니다. 코르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미국 미시간 주의 두 번째 도시인 그랜드 레피즈에서 어느 해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낼 때였습니다. 저를 초대한 집에는 거실에 몇 개의 항아리가 있었는데,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감사절용, 구제용 등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고르반 전통을 잘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감사절에 하나님께 드리려고 감사한 일이 있을때마다 준비해 둔 것이고, 불쌍한 이웃을 도울 준비를 해 둔 것입니다. 물론 그 항아리는 다른 목적으로 전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 귀한 전통이 오용(誤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령 부모나 형제가 도움을 요청할 때, 그 난처한 처지를 건너 뛸 수단으로 고르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을 떼놓고 본질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할 순 있지만 더 높고 귀한 본질에 충실함이라 할수 있습니다. 저 역시 카르페디엠을 예찬하는 사람입니다만,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충동적인 감정에 충실할 때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경험자들은 잘 알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오늘 토론의 결론을 궁금해 했을 때, 주님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큰 영향이 없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고 위험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본질이 중요할수록 절차나 방법도 걸맞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무시한 방법은 위험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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