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38호(2021. 9. 27. 월요일).
시편 시 32:10-11.
찬송 5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문열 소설 [금시조]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으면, 다만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1981년 발표돼 동인 문학상을 받은 소설 [금시조]는 서예가인 석담과 그의 제자 고죽 사이에 애증과 갈등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룬 작품입니다. 고죽은 10살의 나이에 임시정부로 떠나는 숙부의 손에 끌려, 석담 선생의 고가를 찾아갑니다. “너를 찾으러 올 때까지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 이렇게 말했지만 숙부는 끝내 그를 찾으러 다시 오지 않았고, 고죽은 석담 밑에서 지내게 되지요. “소학을 읽어라.” 석담 선생이 시키는 대로, 고죽은 문하생들 사이에서 몇 년이고 거듭 소학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끝내 못 본 체 했지요. 15살이 되던 해에, 선생은 그를 소학교로 데려 갔습니다. “세월이 바뀌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신학문을 익히도록 해라.” 그렇게 제자로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게 하고 학문을 익히게 하자, 고죽은 27살 되던 해에 조금한 성취감에 빠져 그의 집을 떠납니다. 그 후 고죽은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산해진미에 묻혀 부호의 집에서 지내다가, 그림을 팔아 받은 종이와 곡식을 한 짐 지어서, 스승의 집에 호기있게 돌아오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9월 7일 방송> a.
2. “인사(1-9절)”과 “고린도 교회의 분열(10-1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둘 셋 넷 등으로 분열한다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애써서 하나로 만들어보려고 힘을 쓰지만 한낱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뉨 혹은 분열에는 불가피한 혹은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하는 방법에 대한 선호도(選好道)나 신학적 차이(교리)라고 하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미니안파와 비 알미니안파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알미니안파를 대표하는 칼뱅을 들 수 있는데, 그의 5대 교리는 자신과 알미니안의 신학적 차이를 설명합니다. 튜립(TULIP)이라는 첫 글자로 요약되는데, 인간의 전적 타락-무조건적 선택-제한된 속죄-불가항력적 은혜-굳게 참고 견딤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며,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파가 있는가하면, 삼위일체 이론을 거부하는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확고한 신앙을 생활에서 표현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교리들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 강조점과 특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생각과 기호가 다르듯,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이런 특징이나 강조점들을 서로가 양해하고 양보할 수 있을 때, 참다운 교회 공동체(Holy Catholic Christian Community)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개성과 사상 그리고 취향을 서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넓은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우리 묵상식구들 중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물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루터교 성공회 등 많은 교파를 배경으로 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제가 루터교회 목사인 까닭에 루터교적 신학과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기 때문에 특정 교파의 교리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제게 항의할 수 있으나, 그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모든 신학을 아우르는 주장을 할 수 없으니, 적어도 루터교적 입장을 들어볼 기회라는 점에서, 여러분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교파가 늘어난다는 것은 신학적 견해가 다양하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전망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외국인 학자는 한국 개신교회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는 중이라고 농담을 했다 합니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는 어떤 사람에 의해 세례를 받았느냐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 아볼로 게바에게서 세례받았느냐로 분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 누구에게도 세례주지 않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것보다 크리스천들의 분열을 우려한 심정을 깊이 헤아릴 수 있게 하는 말씀입니다. 차제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다양한 사람들을 아우르는 지혜를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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