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87호(2022. 2. 23. 수요일).
시편 시 60:5-8.
찬송 13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꽃다발이 어울리던 남자에게> <앤티크>라는 영화의 원작이 됐던 만화를 보면, 장미 꽃다발이 아주 어울리는 남자가 나오지요. 그래서 그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길을 걸어가는 동안, 많은 여자들이 멋진 사진 작품을 구경하듯이 그 꽃다발을 든 남자를 구경합니다. 전 그런 모습이 만화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나 어울릴 모습이라고 생각했네요. 지난 주 현수씨를 보기 전 까지는 요. 식구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자리이니 깔끔한 옷차림을 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말끔한 양복차림에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저의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이었지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 이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의 놀라움, 그 꽃다발의 주인공이 제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었어요. 또 세 번째 놀라움은 엄마의 반응이었지요. 꽃다발을 받아드는 엄마가 설렘과 부끄러움 기쁨으로 부풀어 올라 소녀다운 자태를 보이는 모습 처음 봤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놀라움은 현수씨의 첫 꽃다발 주인공이 비록 엄마라고는 해도 저와는 다른 여자였는데, 질투가 나기는커녕 현수씨가 더 멋져 보였다는 거예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귀가 좀 가렵지는 않던가요? 현수씨가 문 앞을 막 벗어나는 순간, 언니 남동생 엄마 이 세 사람이 현수씨 앞에서는 참고 있었던 얘기들을 한꺼번에 털어놓더군요. 꽃다발을 받고 소녀처럼 기뻐했던 엄마의 분석이 뜻밖이었지요. 그저 오랜만에 꽃을 받아서 기뻤던 것이 아니라, 그런 기획력을 가진 남자를 내가 친구로 사귀게 돼서 안심이 된다나요. 이처럼 현수씨의 꽃다발은 우리 집 식구 모두를 아주 즐겁게 노래 켰답니다. 저도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을 신경 써준 것 정말 고마웠어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년 3월 18일 방송> a.
2. “예수를 죽일 음모(45-5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미움의 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을 소개하는 주제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매우 무섭고 떨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 중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기독교의 복음을 입구에서 거절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십니다. 음행(淫行)만이 아니라 음욕(淫慾)만으로도 동일한 범죄이고, 누군가를 죽인 것만이 아니라 미움만으로도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예증이라고 말입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이 결국에는 살인에 이르게 한다고 말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을 갖기 시작할 때,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살인죄와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는 죄인인 것입니다. 이 말은 해 아래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타종교인을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타종교의 신앙과 행위를 미워하고 여러 가지 강압적인 방법으로 포교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밖이든 안이든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옳고 바른 이른바 선한 영향이 아니라 비뚤어진 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든지, 어쩌면 깨닫지도 못한 체 생을 마칠 것입니다.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두 가지 라는 것입니다. 앞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분이라는 모습이고(사 11장), 또 다른 하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아의 앞모습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들 역시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메시아의 어느 한 쪽 모습만을 대망하는 것이 메시아를 왜곡했다고 하면, 자신들의 기대나 희망과 다를 경우, 가차 없이 반대하고 무자비하게 정죄한다는 것 역시 왜곡입니다. 모든 인간은 앞모습과 뒷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모습만은 장점과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뒷모습만은 부끄럽고 형편없는 거짓투성이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짜 모습, 곧 앞과 뒤라는 두 모습을 모두 바라보며 칭찬과 연민을 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란 인간의 자랑스러운 모습만이 아니라, 허물과 약함까지 감싸 안아 주시기 위해서 눈물 흘리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사랑스러운 면과 수치스러운 면을 모두 껴안는 것임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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