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93호(2022. 6. 9. 목요일).
시편 시 78:61-64.
찬송 16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리 부쩍 더워졌습니다. 오늘은 초여름 냇가를 노래한, 장수철 시 김규환곡 <냇가에서>를 소개합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고요한 냇가에서, 누군가 발 담그고 조용히 새 소리를 듣고 있는 풍경이 자연스레 펼쳐지는, 운치 있고 정감 있는 노래입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따라서 가만히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전해지지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산 새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흰 구름만 두둥실 떠다니는데, 초여름 한 나절 냇가에서 냇가에서. 고요히 흐르는 시냇물, 속삭이는 작은 새, 고운 노랫소리, 냇가에서 한가한 하루여. 물속에 발을 담고 냇가에서, 염소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어느 새 저녁노을 퍼져가는데, 일어날 줄 모르는 냇가에서 냇가에서.”
1978년 발표된 곡이고요. 서정미(抒情味)가 넘치는 수작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곡 중간 쯤 보면, 약간의 감정 표출의 변화를 노려 음이 분산되듯 처리되는 악상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서정적인 느낌을 더욱 부각시키기도 하지요. 작곡가 김규환 선생은 고향인 평양의 산과 냇가를 떠올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초여름 한 나절, 냇가의 정감 넘치는 풍경 속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러한 감성이 전해졌던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동심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맑고 아름다운 곡 <냇가에서>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6월 9일 방송>
2. “그리스도의 적(18-26절)”을 읽었습니다. 유난히 최근에 이르러 인종갈등이 심각합니다. 그 아픔을 일찍 경험한 일본은 스스로를 백인족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은 유럽인이라도 된 듯 다른 아시안에 대해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못된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 결과 이런 미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뜻에서 아시아를 침략한 것이라는 해괴한 “아시아 발전론”을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수천만 명을 죽이고 만행을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진짜 문제는 일본의 침략과 수탈 성노예 창씨개명 등의 현저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미화하고 두둔하며 찬양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친일 잔재들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시각마저 흐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관점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그리스도의 적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합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 참된 진리를 모르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몸을 빌어 오신 육신의 예수가 구원 주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초대교회는 십계명과 사도 신조, 그리고 주기도를 모일 때마다 고백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신 6:4-9의 말씀 <쉐마>를 시간 날 때마다 외우며 가르치듯 말입니다. 그렇게 입버릇처럼 쉐마를 외우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야훼 하나님 신앙을 잊어버렸을지 모릅니다. 4천년이란 장구한 세월 속에서 야훼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수고가 계속된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예배에서 주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깨우치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되듯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고,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란 성령께서 감동 감화시키지 않는데, 어떻게 진리에 대해서 궁금해 하며,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 있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성 삼위일체이신 분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탈북 동포의 탈북 스토리를 들으며 감동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주어진 남한 생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날 때마다 그가 친히 겪었던 두 곳의 삶을 비교하면서 산다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말했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1992년도와 1993년도에, 탈북 동포 한 가정을 2년 동안 매달 20만원씩 도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얘기를 가끔 부탁해서 교우들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 남한 사람들과의 삶의 차이에 대해서 끝도 없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남한에 정착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삶의 의욕과 용기 그리고 기쁨이 있을 수 있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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