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36호(2022. 7. 22. 금요일).
시편 시 88:14-15.
찬송 49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여름 바닷가는 정열의 상징이지만, 늦여름의 바닷가는 왠지 쓸쓸함을 주지요. 한 겨울의 바닷가는 어떻습니까? 그 때 찾은 바닷가에는 마음 아픈 사람 실패를 겪은 사람, 어딘가 일탈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넓은 치마폭처럼 마음을 감싸줄 것 같은 바다의 느낌 때문이겠지요. 이 시간엔 눈물로 채워진 바닷가, 울음을 참는 바닷가의 이미지가 실려 있는 곡을 준비했습니다. 유안진 시 한 성석 곡 바닷가. 모든 걸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바다의 큰 가슴은, 때론 그렇게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요.
“가슴아, 내 가슴. 눈물 채운 바다여, 밀리며 쓸리며, 울음 참는 가슴아. 그리움은 아침마다 고동을 울리며 떠나가는 배. 돌아오지 않는 안타까움은 잠겨질듯 가무시, 제 홀로도 떠 있는 슬픈 바위 섬. 날려도, 날려도 다시 뜨는 물새야, 아픈 날갯죽지 소금 절인 고독이여, 허깨비라도 좋아라. 팔매질을 해 다오. 저녁바다 내 가슴에, 붉은 꽃물 들도록.”
바다 앞에서 돌아오진 않는 님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을 고운 선율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의 운율을 능하게 조화롭게 바꾸어 가는 능력이 돋보이는 곡이다. 이런 평을 받았습니다. 외롭고 허전한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는 것이, 공허한 마음을 감싸 주는 듯한 그러한 느낌의 가곡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7월 21일 방송>
2. “아담과 그리스도(12-21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시간 날 때마다 읽기를 게을리 말아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죄와 구원의 문제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총의 크기를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사도는 우리 인류 역사에 등장한 두 인물을 비교합니다. 한 사람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언된 메시아 예수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담의 죄 된 삶의 길은 그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었고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를 살리려고 행동하신 예수의 경우는 언제나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배경이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크게 구분하면 인간 중심주의와 하나님 중심주의라는 두 차원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아담은 죄를 짓고 그 죄의 고통을 후손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란 하나님과의 불화였고 부조화 또는 불순종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 결과는 실패와 파멸이며 죽음이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신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불화하였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 중심주의에 철저하신 예수는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 그리고 시련에도 불구하고 순종과 화해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모든 종중의 종으로 순종의 길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황량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신 역사적 사건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은 문명의 변두리 차별의 변방인 갈릴리에서 가난과 온갖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무명의 오클 로스(οχλος/일반 대중 혹은 천민)의 이웃으로 살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견과 주의 주장을 가진 사람으로써는 불가능한 순종의 삶을 사는 존재란 오클 로스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아담의 자손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까지도 인간의 기준을 고려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바로 도덕성입니다. 그러나 이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함정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정치가들의 미사여구는 수많은 대중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처럼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완덕(完德)에 이르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그 사람의 중심은 여전히 죄악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던 칼카타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결코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을 수도 없이 하였다면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일찍이 이 점을 분명히 하시려고 산상수훈에서 언급하신 일이 있습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마 5:28)고 말입니다. 아담의 자손에게 율법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완덕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참 구원자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할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니, 율법의 가장 큰 역할은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3. 오늘이 22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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