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39호(2022. 7. 25. 월요일).
시편 시 89:3-4.
찬송 47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슬픔을 노래한 곡이 있습니다. 김소월 시 최병철 곡의 <초혼>인데요. 소월의 시 초혼은 작곡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작곡해 보고 싶은 감흥을 받곤 한다고 합니다. 선율의 처리 문제로 쉽사리 완성하기 힘든 곡이라고 하지요. 수많은 작곡가가 이 시에 곡을 붙였고, 미국의 저명한 작곡가도 곡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 넋두리이면서 넓게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시이지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간 산 위에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아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1961년 작곡가 최병철 선생의 제1회 작곡발표회 때 발표 되었습니다. 깊은 서정성과 낭만적인 선율로 곡이 처리되었지요. 최병철 선생은 중학생 시절부터 남달리 소월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많은 소월의 시를 늘 낭송해 오다가 이 곡을 만들게 되었다고 하네요. 대부분의 다른 작곡가들도 소월의 시 <초혼>에 곡을 붙일 때,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 어두운 탓인지, 곡 전반적으로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기 마련이지요. 작곡가 최병철 선생도 예외일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곡 전조에서부터 조금은 음산한 듯한 분위기에 이어서, 부르짖는 듯한 라스타티브에 이어서 한숨짓는 애틋한 선율이 이어지지요. 가버리고, 잊어버리고, 죽어버린 우리들의 공통된 사랑의 혼을 부르는 처절함이 감도는 곡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7월 19일 방송>
2. “정의의 종(12-23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말이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기대했던 말이라고 해도, “그러나”, “그렇지만” “또는” 이런 부사로 시작하는 말이라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전적(integrity)으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한 구절을 침소봉대해서 성경을 꿰뚫고 있는 성경의 정신 혹은 맥락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고, 그리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말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울 사도는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중략> 오직 주 예수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또한 히 9:27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자들은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을 이해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니 만일 현재적 구원의 말씀을 읽은 후에 “나는 구원받았다.”고 제 멋대로 살아간다면 황당하게도 미래적 구원 앞에서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런 사람들을 두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공로로 은혜아래 살게 되었다거나,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고 해서, 제 마음으로 살 순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종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라는 말씀입니까?
우리 모든 크리스천은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종노릇하지 않도록, 예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로운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강조하는 말로써 소위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자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사랑의 노예”라든지 “섬김의 노예”라는 말이 가능하면 실제로 그렇게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삶을 살았고, 테레사며 장기려 의사와 이태석 신부가 그런 삶을 살다 우리 곁을 떠난 위인들입니다. 율법의 종은 영원히 죄 아래 살고 있는 존재라고 하면, 은혜의 종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 안에서 살아갈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방향성은 어느 쪽 으로 향하고 있으며, 율법의 종으로써 입니까? 은혜의 종으로써 입니까? 억지 종노릇입니까? 자발적인 종노릇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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