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08호(2023. 1. 10. 화요일).
시편 시 118:4-6.
찬송 4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홍난파와 더불어 서양 음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뿌리내리게 한 제1세대 음악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작곡가 현제명을 꼽지요.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성악도였습니다. 그는 유학도중에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었고, 이후 현제명만의 음악 어법으로 많은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 암울했던 시대상을 반영해서 구슬프고 애조 띤 선율이 많았던 우리 가곡 가운데, 현제명의 작품은 유독 밝고 경쾌한 곡이 있지요. 새해를 맞아 자주 애창되고 있는 <희망의 나라>로 역시 그러한 곡들 중의 하나입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 편 언덕에 산천 경계 좋고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 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산뜻하고 유창한 선율 진행 때문에 듣는 사람도 함께 유쾌해 지는 곡입니다. 1931년에 발간된 [현제명 작곡집 제2집]에 수록된 이후에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대표작이지요. 현재명은 대표곡인 <그 집 앞>을 자신의 노래로 대중 앞에 초연할 정도로, 성악가로써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연희전문 영어교수로 부임한 그는, 귀국 초기에 독창회를 갖거나 가곡 등을 취입하는 등, 주로 성악활동에 전념을 했습니다만, 곧 작곡에 몰입하게 되지요. 부르기 쉽고 이탈리아의 민요를 연상케 하는 가볍고 경쾌한 곡의 분위기가, 테너였던 자신의 목소리와 맞추어 작곡된 때문이라고 전하기도 합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월 9일 방송>
2.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15-23절)”을 읽었습니다. 지난 2일자 국민일보에는 남서울 은혜교회 원로목사이신 홍정길목사님과의 신년 대담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의 제목이 “목사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라고 쓰여 있다. 대담 내용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믿는다는 진단이나, 잘 믿는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주장이 시원치 않아서 실망했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쳤다고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화율이 떨어진 것과 새벽기도가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그 역시 진정한 진단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가르쳐 왔고, 무당 굿거리 같은 기도를 가르쳐온 것을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하면 소원성취하리라는 복음이 어떻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이며, 주 삼창을 시작으로 줄 곧 주시옵소서 만을 외치는 기도가 어떻게 성경적 기도인가 하는 반성이 앞서야 하는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님”으로 기도를 시작하지만, 과연 주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교회의 머리로 섬김을 받고 계시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외쳤는데, 우리가 지켜야 할 교회는 어떤 교회여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세속적인 아방궁터로 만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고 탄식했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한 말입니다.
사도는 오늘의 교회인 우리들을 향해서 뼈아픈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중략>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여러분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17-18절).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의 진단에 따르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모르고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른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간절히 바랄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우리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도 큰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무지였습니다. 무지보다도 더 큰 불행에의 원인은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우리 부모들은 이런 국가적인 수치와 수모가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힘쓰셨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저 역시 이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 신앙 세계에서도 똑같은 진통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힘쓰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계발에 있는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의 설교에서도 하나님 얘기보다는 사람들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축복에 대해서도 전혀 느끼지 조차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고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제 자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다니 말입니다.
3. 오늘은 저의 모친 25주기 추모예배를 고향에서 가질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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