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10(2023. 1. 12. 목요일).

시편 시 118:11-13.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김동진은 193118살이던 숭실중학 5학년 때 <봄이 오면>을 작곡했습니다. 이때부터 음악가로써 생을 시작했지요. 올해로 작곡가로 활동한 지 일흔 여덟 번째 해를 맞는 셈인데요. 활동한 기간에 비해서 다작을 한 작곡가는 아니었습니다만, 50년대 후반 곡을 쓰는데 있어서 신중한 을 기했던 김동진이 이례적으로 비교적 많은 작곡을 한 시기였습니다. 이 때 가곡 영화 음악 관현악곡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서 50여 놀라운 창작욕을 과시했지요.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이 <진달래 꽃> 역시 이 시기에 작곡 됐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서서히 감정이 고조되는 곡의 전개에서, 시를 지을 때의 시인의 심정을 되뇌이며 작곡했다는 김동진의 음악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유년기를 보냈던 평양에 돌아온 김동진은, 변해 버린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정치적인 성향이 뚜렷해진 북녘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후손이었던 그에게 창작의 자유는 너무 먼 이야기였지요. 한국 전쟁을 계기로 남하해서, 이후 우리 가곡사에 길이 남는 서정 가곡들을 작곡해 왔습니다. <진달래 꽃>은 그가 서라벌 예대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에 완성한 곡입니다. 소월의 생애를 다룬 <길은 멀어도> 라는 영화를 위해서, <못 잊어>와 같은 소월의 명시에 작곡한 곡들 중의 하나였지요. 청초하면서도 담백한 시의 서정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11일 방송>

 

2.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됨(11-22)”을 읽었습니다. 어떤 의도에서건 편 가르기는 가장 나쁜 집단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편 가르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선의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유대인들이 유대인 밖의 다른 종종에 대해서 붙여 준 이름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구집에서 이방 사람 혹은 이방인을 최초로 언급한 것이 창 17:12이방 사람을 돈으로 산자를 무론하고인데, 25:44너의 종은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와 맥을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정당하든 아니든 간에 편 가르기는 힘이 센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예전 사진을 뒤적이다가 1940-1950년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 안 풍경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맨 바닥에 중간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별하는 휘장이었는데, 제단에서 오른 편에는 남자들이, 왼편에는 여자들이 앉았던 모양입니다. 유대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크리스천들 역시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적자가 된 것을 뽐내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지금도 남성에게는 붙지 않는 특별한 호칭이 여성에게는 붙습니다. 여자 전도사 여류 소설가, 여성 의원 등등으로 말입니다. 시간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편 가르기는 마침내 세력화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종교적 편 가르기가 우리 사는 세계를 멸망시킬 기세로 힘을 키운 것입니다. 거대한 장벽이 쳐진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첫 단추가 잘못 꿰진 때문에 생겼고, 시간과 함께 그 간격이 커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선민에게 차별대우를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민으로 부르신 처음 장면을 다시 살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로 인해서 온 세상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공평하고 균등한 은총을 나누어 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민의식은 왜곡되었고, 자신들만이 누리는 특권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그리고 온갖 편 가르기의 이념들에는 장벽이 하나 둘 쌓여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오해와 분쟁 그리고 다툼이 끊이질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이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고 하나의 형제자매로 사이좋게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더 이상 편 가르기는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어리석고 미련한 일에 불과한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막힌 담을 허무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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