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13호(2023. 8. 3. 목요일).
시편 시 9:4-6.
찬송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없지요. 정확히 언제가 될지, 과연 전한 마음만큼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기약 없는 기다림 말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때론 약이 되기도 합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에는 희망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세상엔 기다림이 있기에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반드시 존재하지요. 물론 반드시 보상 받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 무뎌지고, 강열한 믿음에서 시작된 기다림을, 차차 마음에서 놓게 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테니까 말이지요.
“노을 진 하늘에 비쳐지는 사람아, 언제나 그대를 사모하는 마음, 그대로 남아 고개 숙인다. 귀밑머리 휘날리며 소리 없이 눈물짓네. 다정했던 그 시절, 푸르던 그 옛날 기다림 속에, 떠도는 이 마음 너를 생각하네. 노을 진 하늘에 비쳐지는 사람아, 돌아올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 그대로나마 고개 숙인다. 지워지는 시간 속에 하염없이 눈물짓네. 울타리를 만들던 푸르던 그 옛날 기다림 속에. 떠도는 이 마음, 너를 생각하네.”
마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는 듯, 애상적이고 서정적인 악상이 가득한 곡입니다. 세레나데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처럼, 어느 저녁 창가 아래 서서 연인에게 노래를 바치는 한 남성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서로 같은 마음으로 다가 서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일 수 있겠지요. 시인은 이미 불꽃이 사그라진 상대에게, 마음을 돌리기를 애원하는 그 처연한 마음을, 글 안에 담아냈습니다. 기다림이 지닌 애절하고 또 서글픈 마음이, 연주자의 음성과 곡의 분위기를 통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옥이 시 김동환 곡 <기다리는 세월>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8월 5일 방송>
2. “안식일의 주인(2:23-28)”과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예수(3:1-6)”을 읽었습니다. 두 단락 모두 안식일 논쟁에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오늘은 첫 단락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가장 논란이 됐던 문제는 안식일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서도 안식일(주일) 논쟁은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안식일 논쟁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다. 어느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지켜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느냐?” 그러자 주님은 다윗의 옛 고사를 들추어내셨습니다. “다윗의 일행이 에비아달 대제사장 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고 함께 한 군사들에게도 먹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게 아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말입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시절을 거치면서 많은 자각운동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는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묻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히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하고, 율법의 종교를 강화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의 은총아래 보호를 받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유대교는 바리새파라는 종파가 생겨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자는 운동뿐 아니라, 가장 관리 감독이 쉬운 안식일의 규정에 대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가지 보조 율법 멜레카(Melacha)를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의 근본 목적과 정신과는 사라져 버리고,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분위기가 고착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침내 이런 문자적 율법주의가 가장 왕성했던 때가 1세기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던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종교가 가장 위험해 지는 순간이란 그 계율의 정신과 목적이 보이지 않고, 허울인 문자만 남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그 목적과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것을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이란 사람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가장 활발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들은 정반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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