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01호(2023. 10. 30. 월요일).
시편 시 27:7-9.
찬송 3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힘든 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수차례 찾아오는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산을 오르곤 하지요. 언젠가 산허리에 구름이 낮게 깔린 대관령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의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그 가르침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자연 앞에서 우리는 그저 늘 경탄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라는 존재, 우리가 지닌 고민들이 얼마나 사소하고 작은 것인지 반성하게 되지요.
“저기 물안개 소낙비 아련한 산은, 그려도 움직이는 한 폭의 비단. 저기 빨간 단풍으로 색칠한 산은, 의안이 손짓하며 우릴 부르네.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는, 내 인생 초록물 들이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저기 찬바람 하얀 눈 소복한 산은 누구를 기다리다. 봄은 먼데. 저기 진달래 철쭉으로 불타는 산은 구름도 수줍어서 휘어 넘는데.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는, 내 인생 초록 물들이면서 나그네가 되라 하네.”
수목으로 옅게 그려내는 듯 보였던 대관령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대관령의 풍경을, 작곡가는 음악으로 담아냈지요. 시인과 작곡가는 가곡 위촉을 받고서, 많은 사람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대관령의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수차례 대관령에 올랐다고 합니다. 대관령이 지닌 신비스러운 그 변화무쌍한 사계절을 글과 음악에 옮기기 위해서지요. 20년 전 완성된 곡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바로 지금 대관령을 바라보는 듯 마음에 진한 파문이 더해지는 기분입니다. 신 봉승 시 박 경구 곡 <대관령>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0월 30일 방송>
2.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쓰다(렘 36:11-26)”을 읽었습니다. 2007년에 중국 현지 목사님의 부탁으로 중국어로 된 작은 책을 발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해 세미나 형식으로 중국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친 일이 있었는데,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그분들이 읽을 만한 책을 발행하자는 제의였습니다. 첫판으로 500권을 발행해서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의 자리와 그분들의 삶의 자리가 너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코끼리 다리 만지기를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옥에 갇힌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룩이라는 서사(書士)를 통해서 하나님께 받았던 말씀을 써서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는 문서 선교라는 범주에서 그 효용성을 따져보자는 의미라 하겠지만, 바룩의 대필로 준비한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들을 절망적인 위기에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수단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집트와 앗수리아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나라들의 틈바구니에서 잔꾀나 부려 줄서기나 하려는 등의 생존전략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택하라고 말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준비한 현실적 심판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의 현실적인 심판은 문밖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두루마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옷을 찢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화로 불에 두루마리를 한 장 한 장 칼로 베어 태워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서사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오라고 명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 유다의 운명은 한발 한발 70여년의 긴 바벨론 포로의 굴레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라의 독립과 부흥보다는 바벨론에 항복하기를 권했으니 말입니다. 유다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아갈 자격을 상실한 때문에, 심판의 아픔과 고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이 항상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는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잘못된 삶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승리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거짓 신앙 때문에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거짓 신앙에 눈멀어 있는 백성들에게 고난과 항복이라는 치욕을 강조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얄미운, 그래서 엉터리 예언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어쩌면 우리 시대에도 이런 멸망과 저주를 퍼붓는 지도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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