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32(2023. 11. 30. 목요일).

시편 시 33:13-15.

찬송 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날을 추억할 때, 우리는 여러 개의 추억가운데 가장 화려했던 순간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내 생애 중에서 가장 눈부셨던 날,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빛나는 순간이 흔하다고 느낄 만큼 생에 여러 번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이 몹시 짧고 곧 부서질 것처럼 아스라하지요. 그 때 추억을 여러 번 꺼내어 곱씹는다고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이라거나, 태생적이라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씩 추억에 기대서 견뎌내야 할 순간은 있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가끔씩 옛 친구들을 깊이 그리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현재의 가족이나 동료들은, 아마 지난 날 내가 걸어왔던 길을 상상하기 못하거나, 그저 모호하게 그려내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난 날 그 기억 안에 공존했던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같은 추억과 그리움을 갖고 있지요. 자신들의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이 쉽지 않을 땐, 그 과거를 함께 공유했었다는 것만으로, 묘한 동지의식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대어 살만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요.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현재라는 사실만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128일 방송>

 

2.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벌이 내리리라(1-10)”살아남은 이들이 돌아오리라(11-13)”을 읽었습니다. 스바냐는 남왕국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로(639-609 B. C), 그의 족보를 밝힘으로 예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가 남왕국 왕족이었다는 점으로 아마랴와 므낫세 왕은 형제지간이며, 그다랴와 아몬 왕과는 사촌 지간, 부친 구시와 요시야 왕과는 육촌지간이었으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그리고 스가랴 세 왕과는 팔촌 지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족이었기에 남왕국 유다의 지도자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고발하는데 있어서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부친을 구시(구스인, 에티오피아인)를 밝힌 대목인데, 이방인을 족보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이름이 구시일 뿐 구스인은 아니라는 주장과, 구스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점을 들어서(가령 함의 아들 구스/10:6-8, 모세의 아내 구스인/12:3) 실제일 가능성을 주장하나, 우선 구스인의 피부색이 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헬라어 에티오피아는 그을린 얼굴을 의미하기에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바냐가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요시야의 개혁 이전의 시대 상황은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는 점을 개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모든 죄악의 출발점으로, 판사나 예언자 그리고 사제들까지도 거짓과 불의 그리고 교만과 악행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뭇 민족의 뿌리를 뽑고, 성 모퉁이의 망대를 헐고,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돌무더기를 만들고, 사람 하나 살지 못하도록 거리를 휩쓸겠다 예언합니다. 그런 다음에 뭇 민족의 입술을 정하게 한 후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섬기게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이름만 믿고, 남을 속일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편히 쉬리니, 아무도 들볶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을까를 회의할 때가 있습니다. 거대한 먹구름처럼 몰려와 악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절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대학 동창 중 하나가 학창실절에 존경했던 총장님과 가깝게 지낼 기회가 있었는데, 물질 앞에서는 그렇게 초라해질 수가 없어서 큰 실망감을 가졌노라 씁쓸해 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진면목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그렇게도 역설하면서도, 물질 앞에서는 시장 잡배나 하나 다를 바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의 또 다른 모습으로, 중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지도자의 민낯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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