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은 부전공으로 택했던 것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신약을 전공한 것 보다 더 중요한 과목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사실 대학에서나 대중 강연에서나 신약을 더 많이 얘기했지만,

가장 많은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많은 질문중 하나는 예배를 아름답게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쓴 예배학 책 서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그것은 호기심의 결과물이고 또 배움에 발을 담그는 중요한 첫 걸음인 때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질문을 진지하게 시작해 보라고 말입니다. 


은퇴후에 한 곳 교회를 다니지 않고, 

다양한 교회를 출석하는데 저에게는 매우 유익한 시간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예배의 다양성에서 배우고 느끼고 깨우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안 되는데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갖게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깊은 생각없이 예배를 주관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 원인은 온통 설교 한 편에만 매달린 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배가 전체적으로 통일성도 없고 산만하고 위엄과 장중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설교가 돋보이기 위해서라도 예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대한 질문도 진지했으면 좋았겠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루터교회 등 예배 의식을 갖고 있는 전통 교회들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합니다. 

물론 성호 긋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시작하거나, 설교를 시작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예배를 시작할 때, 설교를 시작할 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시작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설교 역시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 안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확고한 정신을 가진 예배 인도자라고 한다면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려는 중심점을 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 내용 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설교 내용중에, 

자신을 내세우려는 일체의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제가 어느 주일 아침, 몸이 아파서 집에서 TV로 여러 곳 교회 예배 실황을 통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몇 교회는 대형교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예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교회 목사를 예배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의 주인이 바로 그 교회 담임목사였기 때문입니다. 

예배 순서가 있지만 자기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부흥회라면 전도나 교육을 위한 집회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신 예배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온갖 신소리에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성가대의 찬양도 자기를 위한 노래가 되어 버린지 오랩니다. 

잘했느니 못했느니 평가도 서슴치 않고 나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그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호를 긋는 일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방향을 어디로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제단을 향하느냐? 아니면 회중을 향하느냐? 고 말입니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그 대답을 드리기에 앞서서 예배는 두 가지 형식을 가진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성례전적인 요소입니다. 

예배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오시는 요소를 의미합니다. 

성경봉독이나 설교 성찬 축복선언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 즉 제사적인 요소입니다. 

찬송, 기도, 감사 등입니다. 


무엇을 하든 성례전적인 요소일 때는 회중을 향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회중을 향해서 말씀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때문입니다. 

방향을 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띄고 있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나 성경봉독은 바로 회중인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도록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무엇을 하든 제사적인 요소를 진행할 때는 제단을 향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빌기 위해서, 그리고 받은 은총에 감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배 인도자가 제단을 향하고 있다면, 

회중은 지금 예배하는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적인 것이구나 느끼도록 말입니다.


예배 인도자의 방향만 봐도, 지금 진행중인 예배가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임재하시는 내용인지, 

아니면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용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를 제단으로 향해서 말씀했다고 하면 이것은 제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중을 향해서 했다면 이것은 성례전적인 내용입니다. 

예배 인도자가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흠향해 주시기를 비는 마음을 가졌다면 

제단을 향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가 삼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라는 마음이라면

회중을 향해야 옳습니다. 

예배 인도자는 스스로 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느 쪽인가?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은 무지입니다. 

모르니까 용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예배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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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교나 예배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가령 민간 신앙인 무당의 기도에는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비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무당이 넙적 엎드려 천지신명을 향해 절하는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우리로써는 동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신비로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불교의 사찰 대웅전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많은 부처들과 나한들이 좌정한 자리 앞에

좌선하는 자세로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을 볼 수 있습니다. 

목어라고도 부르는 목탁은 물 속의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와, 

눈을 감지않는 물고기처럼 졸지말고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거나 대중이 모여 경전을 외울 때 운율과 박자를 맞추고, 

수행중인 수도승의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자, 번뇌와 잡념을 깨트리게 해 주는 신호음으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 역시 상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상징이란 소리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표현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약속이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십자가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의미한다든지, 

두 손을 모으는 행동은 절대자에게 소원을 비는 기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로마의 지하교회(카타콤베)에서는 수많은 물고기 그림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물고기라는 헬라어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의 첫 글자였기에

단순히 물고기만을 그렸을 뿐이지만, 사실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깊은 의미를 줄 수 있다 하겠습니다.


1. 예배에 담겨 있는 상징적 표현들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드린다면 

  가. 제단으로 나아가는 행진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동안 제단은 하나님이 계신 자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예배를 시작할 때 찬송

       을 부르면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존전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

       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에도 제단으로 나아가고, 예물을 드릴 때에도 

       제단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 제단 봉사자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라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사로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고,

       찬양대는 천국의 음악으로 하나님과 예배자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를 읽는 이, 대표 기도자, 그리고 성찬을 돕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다. 상징적인 용어들이 있습니다. 

       말 없는 기도인 묵상,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 하나님을 향해 부르는 찬송,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 선포와 성찬,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써 감사와 봉헌,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 등이 있습니다.

  라. 거룩한 행동의 상징이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게 하는 십자 성호긋기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축복하는 손이 있습니다.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이 있고,

       권위와 은총으로써 안수를 들 수 있습니다.

  마. 예배당을 꾸민 상징들도 있습니다.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상징하고,

       촛불은 세상의 빛이시며 생명의 빛이신 주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물, 특히 예배당 입구의 물은 세례의 물을 상징하고, 

       승리의 깃발과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들 수 있습니다.

  바. 중요한 것은 이런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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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은퇴를 하고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드릴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평생 인도했던 저의 예배를 추억하기도 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의 예배에서 아쉬운 점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런 아쉬운 문제들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의식예배든 아니든 그 문제들이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기에 더욱 충격적입니다.


제가 미국의 한 신학교에서 겨울 학기를 보낼 때 예배에 대한 과목만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저의 주임교수가 인상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로 질문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의 기도를 떠 올리며 아쉬운 점들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찬송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질문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찬송을 부르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부르는 찬송이 가장 제대로 된 찬송일까?

찬송은 노래오는 많이 다릅니다. 

노래는 사람들과 함께 부르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을 돋우는 추임새가 필요하고 어깨춤을 추게하는 기교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부르는 노래이기에 두렵고도 엄숙해야 합니다. 

제가 한 달에 한번 설교하는 교회는 영국교회 찬송가를 사용합니다.

우리 한국 찬송가와 같은 곡인데도 얼마나 장중하고 엄숙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찬송이라는 실감이 나니까 말입니다. 

그런 배경에는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의미를 찾을 뿐 아니라,

가락에도 많은 주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도는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현역일 때 저의 교회엔 미국 선교사님들과 독일 선교사님이 협동목사로 도운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장기 협동을 하셨는데, 친해졌다 싶을 때 제게 충고를 해 왔습니다.

가장 많이 지적을 받은 것이 기도였습니다. 

평신도 대표 기도자의 기도만이 아니라, 저의 기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내용이거나, 

때로는 하나님에게 세상 정보를 알려드리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초등학생에게 하듯 깨우쳐 주려고 안달을 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무지한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겸손히 전하면 될 것을,

때로는 제 감정에 못 이겨서 하나님께 역정을 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책망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이 예배에서는 많고 많습니다. 

왜 예배 중에 일어나야 하는지, 왜 이 순서는 앉아서 듣는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 순서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갖게되고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얻으려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상해야 합니다.


둘째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의식에 뭔가를 첨부하려는 시도입니다. 

   제가 많은 의식교회 예배에서 발견한 문제점 중 하나는 의식문에 따라 예배드리기 보다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첨가하는 경향이었습니다. 

물론 예배란 남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개성을 살릴 수도 있고, 뭔가 새롭게 예배드리려는 시도를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양 교회들 대부분은 예배의식문을 정확하게 따르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배학자들은 한번 결정된 예배의식문은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의 예배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그걸 함부로 훼손할 경우를 염려한 것일 것입니다.

   가령 의식 예배에는 묵기도가 더러 나옵니다. 죄를 고백하기 전에 잠깐 묵기도를 가집니다. 

그런데 고요한 가운데 묵기도를 할 절호의 기회인데, 그 때 피아노나 오르간으로 반주를 연주합니다.

묵기도의 본래 목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데, 반주에 나오는 가락이 마음을 점령한 때문입니다.

그 잠깐동안의 침묵을 참을 수도 기다릴 수도 없어서 반주를 끼워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감리교회에서는 예배의 말미에 복음가를 넣었는데 저는 그 노래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날의 예배를 망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 복음가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곡이었는데 3절까지 부르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노래의 가사와는 너무 다르게 살고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세상 등지고 살기로 했네x3 뒤돌아서지 않겠네."

심지어 이런 확신을 그 예배에서도 깨닫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초입에 <영광송>을 대신해서 평화의 인사와 함께 복음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는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 평화의 인사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부르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겹치도록 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영광송을 대신한 복음가 <평안을  네게 주노라>는 영광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바꾼 이유는 그 복음가가 마음에 와 닿는 감상적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예배를 부흥회 정도로 이해하는 가벼움이 큰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그 분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제게 목회실습을 하였던 분이라서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해서 설교를 하는데, 회중들을 어린 아이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설교에서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질문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예요?" 시종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할 설교 자리에서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설교는 교육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은 부흥회 같은 교육이나 전도 혹은 봉사 집회에서나 필요한 방법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또는 문제가 되는 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교육은 따로 시간을 만들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교육자료를 준비해서 회중들에게 제공할 일입니다. 

   저는 부흥회는 부흥회 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흥회의 가치를 결코 낮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책망하고 회개하고 결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다워야 합니다.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대전제가 바탕에 있기 때문입니다.

농담과 심지어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 말들이 예배나 설교에서 사용된다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 저는 생애 첫번 맞는 임직식을 코미디화하는 모습에 분개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한다는 감격과 결심을 갖게 할 중요한 자리가 우스개꺼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많은 뜻있는 분들이 현대 교회의 예배가 가벼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주일은 TV로 주일 예배실황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목사일수록 예배를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실제로 그 성경구절들은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거자료(proof text)에 불과했습니다.  

성경 구절은 그 자체로 특별한 삶의 자리(배경)을 가진 말씀입니다. 

그래서 쉽게 인용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를 근거로 성경구절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부탁합니다. 

부흥회에서는 이를 최대한 용납할 수 있겠지만, 예배에서는 지양했으면 합니다. 

설교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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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터교회의 예배의 구성과 그 정신.

   루터교회는 흔히 의식예배를 드린다고 말하는데, 좋은 지적입니다. 

의식이라고 부른 용어는 Litergy(리터지)입니다. 

먼저 의식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루터교회의 예배 구성과 그 정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의식이란 순서(order), 의식(ritual), 예절(ceremony)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차례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 순서 :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교파들은 순서를 갖고 있습니다.  

               가끔 순서가 없이 즉흥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보았지만, 매우 불안했습니다. 

               순서는 예배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내용들을 안내합니다. 

               예배 참가자들은 예배의 내용과 진행상황을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2). 의식 : 여기에서 말하는 의식이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묵음으로 진행되는 특별한 예배집단이 있습니다. 

               신비하긴 하지만 공동체적인 예배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설교와 성찬 등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언어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예절 : 예배는 문자 그대로 풀어 말하면 예절을 갖춰 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예배든 예절을 갖춰야 합니다. 

               말씨와 걸음 걸이 그리고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숙이는 등은 예절바르게 해야 옳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예배를 희화화하는 것이나, 저질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예절없음 입니다.

               최근 예절없는 예배가 성행하는 것은, 과거 부흥회의 분위기를 오해한 것 같습니다. 


둘째, 루터교회의 예배의 구성과 그 정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터교회의 예배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대화적 구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만남이라는 구조입니다. 


    1).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으로써 예배구조.

        흔히 예배를 보느냐, 아니면 드리느냐를 두고 언쟁을 하는데 모두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과 예배자들이 만난다면 모두가 예배입니다.

        루터교회의 예배는 그 예배 내용에서 하나님과 예배자가 만나는 내용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오시는 내용을 성례전적인 요소(sacramental elements)라고 부릅니다.

        성례전적인 요소들로는 성경봉독, 설교, 성찬과 축복선언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내용을 제사적 요소(sacrificial elements)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이 찬송과 기도 감사 등입니다. 

        그래서 루터교회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가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만나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면 아멘이나 할렐루야로 화답합니다. 

          

    2).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만남으로써 예배구조. 

         루터교회 예배의 내용에는 매 주일 변하지 않고 똑 같은 내용들이 나오게 됩니다. 

         기도송 등 영창, 신앙고백과 성찬의식과 주기도 그리고 축복선언이 그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변하지 않는 내용 곧 ordinary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매 주일 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찬송과 성경봉독문 그리고 설교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를 특별한 것이란 의미로 propers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구조는 신앙생활 역시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닮았다 싶습니다.

         변하는 것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야 하듯 말입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중에서 경중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예배를 떠받드는 나름 중요한 내용인 때문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예배의 구성요소들이 가진 정신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인 예배는 모든 구성요소가 다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하나도 허투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소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예배인 때문입니다. 

        찬송은 가장 아름답게 불러야 합니다. 가락과 가사를 분명하게 지키면서 말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께 바치는 진정성 있는 간구여야 합니다.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도 전심으로 귀를 기우려 들어야 합니다.

        예배 봉사자는 자신의 역할을 숙지하고 겸손한 마음과 몸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대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중을 대표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예배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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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골 집 주변에 있는 한 감리교회에 출석할 때가 있습니다. 

예배의식을 잘 갖춘 예배인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교회력에 따라서 주일 이름을 꼬박 부르고 있는 것도, 

죄의 고백과 용서를 따르는 것도, 

무엇보다도 성찬예식을 매 주일 시행하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해서 입니다. 

그런데 영창을 전혀 부르지 않는 것과 

교회력을 사용하기는 하는데 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오늘은 교회력과 예배의 관계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 첫째, 교회력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안내하고 제한하는 도구로써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고 닮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생애를 묵상할 과제가 있습니다. 

교회력은 그런 점에서 엄청난 역할을 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력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절로 시작해서, 

주현절과 사순절 그리고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반추합니다.

그런 후 성령강림절 후 절기로 약 6개월간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회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하도록 

   첫째, 매 절기를 색깔로 표시해서 그 절기의 의미를 묵상하게 합니다.

   둘째, 매 주일은 절기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성경구절을 읽고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셋째, 예배를 준비하는 이는 그 주일의 예배에 적합한 오늘의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넷째, 예배의 통일성을 위해서 찬송 역시 그 주일의 정신이 흐르도록 준비합니다.


다. 두번째, 교회력은 첫 반년 동안은 그리스도의 삶에 주목하는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강조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막연히 그리스도를 흠모할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보다 구체적이고 타당한 도구를 가져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그 성경 속에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소개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의 첫 반년에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물론 예배 인도자나 설교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첫째, 해당 주일에 소개된 구약본문, 사도서간문 그리고 복음서 본문을 정독해야 합니다.

   둘째, 그 세 본문이 말씀하는 중심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는 훈련을 합니다.

   셋째, 특히 설교자는 그 세 본문이든, 아니면 그 중 한 본문이든 중심주제를 찾아내야 합니다.

   넷째, 성경말씀의 주제를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찾아내고 따라야 합니다.


라. 세번째, 교회력의 후반 반년은 신앙의 성장을 위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주목하고 따라 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속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있습니다. 

제가 33년을 목회했던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몇 달 동안은 기획 프로그램을 가졌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신 분이 했던 첫 몇 달의 설교는 예배를 왜 그리고 어떻게 드리는가에 촛점을 두었습니다.

제겐 매우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그 교회에 부임해서는 비슷한 주제로 교육 프로그램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루터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루터교회 교인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루터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실제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성이 매우 빈약할 뿐 아니라,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교나 불교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합니다.  

교회력은 이런 우리의 관심에 적절한 성구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력은 우리들의 인생여정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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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준목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너무 귀한 질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선교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인도하던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주일을 맞으면 설교를 부탁했었는데, 

어느 주일에는 당신의 설교를 모니터링해 달라고 해서 

회중석에 앉아서 은혜를 사모하는 예배가 아니라, 실습 설교를 하는 학생을 연상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후 부탁하신 선교사님은 모니터링한 내용을 말씀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 괴로웠습니다. 망설이자 그 분은 들을 준비가 됐다고 재촉하셨습니다. 

문제투성이어서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다시 오기 힘들게 되지 않을까 걱정까지 했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설교는 사실 설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교는 성경에 씌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려는 중심점과는 너무 다르게 자신의 얘기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종노릇을 해야 하는데, 그 분은 말씀을 마음대로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참여했던 O 준목님이 인도하는 예배는 기쁜 마음으로 소감을 술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예배 분위기가 형식적인 면에서는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식에 따른 예배가 자칫 드라이할 개연성이 많은 것에 반해서 

예배 진행자와 회중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의식문을 문어체처럼 읽는다면 드라이 할 수 밖인데, 비교적 대화체여서 말입니다. 

다만 예배 중에 들어있는 찬트(가락이 있는 영창)가 그레고리안 찬트였는데 

그 느낌을 살리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영창을 제대로 부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예배다운 예배를 염두에 두면서 각론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의식 예배든 아니든, 모든 예배는 그 예배의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그리고 아무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감동감화시켰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배경입니다.

그래서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혹은 성령의 인도로 드린다는 말이고,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질서 있게 바르게 드린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해석할 때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예배의 두 주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예배자들에게 찾아 오시고,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오시는 부분을 성례전적인 내용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것을 성경봉독, 설교, 성례전, 축복선언 등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리고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부분을 제사적인 내용이라고 부르는데,

기도, 찬송, 감사 등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이런 하나님과 예배자의 부단한 대화적 성격을 띄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오시고, 그에 대해서 예배자가 응답하는 형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실제적인 교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예배를 예배자들의 일방적인 드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슬프고 잘못된 것은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 루터교회 예배가 제구실을 해야 할 이유가 예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배자가 생동감 넘치는 대화적 성격을 띨 때 예배는 감동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 초기에 부산 남천동에 있는 분도 수녀원에서 거행된 수녀종신허원식에 참석했었습니다.

복음서를 봉독하는데 봉독자가 제단의 봉독대로 걸어 나오는 동안 

한 나래이터가 본문의 배경을 설명하는 잔잔한 멘트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봉독자가 봉독대에서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살아 있고 꿈틀대는 듯 했습니다. 

예배 순서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도 감동이었습니다. 

찬송과 기도 성경봉독과 설교 모든 예배순서들이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배자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확연히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 예배는 가관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교회력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세 곳의 성경을 읽고도 설교의 내용은 전혀 딴 판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부활절기인데도 강림절기의 찬송을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로들이 하는 개회 기도와 목사가 하는 목회기도는 중복된 내용이지만 누구도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기도자만 다를 뿐 한 번의 예배에 기도가 중복된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예배 내용들이 모두 따로 국밥입니다.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참여하시는 성례전적인 내용과 

예배자들이 참여하는 제사적인 내용을 확실하게 구분짓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만일 예배 진행자가 제단을 향하면 제사적이고, 

회중을 향하면 성례전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교육시키고 실제로 그렇게 보여주었다면,

적어도 회중들은 지금 진행중인 내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내용인지,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단의 위치가 벽 쪽에 가까워야 할 것입니다. 


감동적인 예배는 교육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의미를 모르는데 어떻게 깨우침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찬송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찬송을 제대로 부를까요?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찬송이어야 하는데, 

제 자신의 기분풀이로 부르는 복음가를 예배 찬송으로 오해하는 것도 교육부재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못 알고 있는 것이 기도와 설교일지 모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어야 합니다. 

서론과 결론을 빼면 7기원 형식인데, 처음 셋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기원이고, 

넷째만이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원이며, 마지막 셋은 우리들 인간의 영혼을 위한 기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넷째 부분에 집중하며 끝도 없이 주시옵소서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그 날의 봉독문인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중심 주제를 

회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인데, 

우리 설교자들은 자기의 주의 주장을 전하는 전거(proof text)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점조차 파악하지 못한 때문에, 설교의 목표는 이미 빗나가 버린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theme)를 요약한 것이 제목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귀담아 들어봐도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알송달송히기만 한 것이 현실입니다. 

반드시 셩경의 중심점이 설교의 중심점으로 발전해야 설교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오늘의 회중에게 들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설교가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교육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이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것이라는 걸 지도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1년에 10차례 이상은 예배를 위한 강좌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예배에 대한 회중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예배 인도자 자신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식 예배의 약점을 극복하는 것은 대화체로 훈련할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기도>를 책읽듯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무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가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임을 안다면, 부드러운 대화체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성경봉독도 문어체와 구어체가 들어 있다면, 거기에 맞게 봉독해야 할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고칠 점이 많습니다. 

찬송가 가사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고 가락도 제대로 불러야 하는데, 

타성에 젖어서 건성으로 대충대충 읊듯 합니다. 

마치 마지막으로 부르는 찬송이듯 온 몸과 마음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찬송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찬식에 참석할 때마다 늘 주체할 수 없는 감동때문에 마음으로 울었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주님의 몸이라." 이 짧은 한 마디 말을 어머니가 자식에게 하듯 한다면 어떨까요?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에게 주시는 주님의 참 피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한다면 말입니다.

의식 예배는 의식문을 읽어가듯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 진행자가 제 멋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한할 뿐, 

실제 진행은 대화체여야 합니다. 그 때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일 것입니다.


예배 진행자는 예배의 주인공이 아니라, 예배의 봉사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말씀을 읽고, 말씀을 선포하고, 축복을 선언할 뿐이지, 

자신이 하나님처럼 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 진행자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예배자의 한 사람으로 자기 자리에서 예배에 동참해야 옳습니다.

TV에서 진행하는 예배실황을 예로 들어봅시다. 

예배 진행자가 설교단에 서서 찬양대가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 찬양을 온 몸으로 다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 은혜로웠다는 식으로 박수까지 유도합니다.

오히려 예배 진행자의 자리에 돌아와서 

찬양대의 찬양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압니다. 

예배 전에 모니터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저 자신의 예배가 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준목님께서도 저의 이야기에 담긴 내용을 깊이있기 살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 

회중들이 동참하는 예배인가 질문하면서 말입니다.  

이런저런 예배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제가 쓴 졸고 <루터교 예배이해>를 천천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문답식 루터교 예배의식 해설"을 잘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그 책을 쓴 목적은 우선 루터교 예배 의식의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정신을 불어넣어준다면 준목님이 부탁하신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문제들 중의 문제는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혼을 불어넣어서 생명력이 꿈틀거리도록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감동감화시켜 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준목님, 

앞으로 구체적인 질문이 생기면 주저마시고 말씀해 주시면

저도 공부하는 기회로 삼고 연구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모든 예배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2017년 11월 28일.


박성완 목사 드림.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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