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은퇴를 하고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드릴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평생 인도했던 저의 예배를 추억하기도 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의 예배에서 아쉬운 점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런 아쉬운 문제들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의식예배든 아니든 그 문제들이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기에 더욱 충격적입니다.


제가 미국의 한 신학교에서 겨울 학기를 보낼 때 예배에 대한 과목만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저의 주임교수가 인상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로 질문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의 기도를 떠 올리며 아쉬운 점들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배 순서 하나 하나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찬송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 질문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찬송을 부르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부르는 찬송이 가장 제대로 된 찬송일까?

찬송은 노래오는 많이 다릅니다. 

노래는 사람들과 함께 부르거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을 돋우는 추임새가 필요하고 어깨춤을 추게하는 기교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부르는 노래이기에 두렵고도 엄숙해야 합니다. 

제가 한 달에 한번 설교하는 교회는 영국교회 찬송가를 사용합니다.

우리 한국 찬송가와 같은 곡인데도 얼마나 장중하고 엄숙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찬송이라는 실감이 나니까 말입니다. 

그런 배경에는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의미를 찾을 뿐 아니라,

가락에도 많은 주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도는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현역일 때 저의 교회엔 미국 선교사님들과 독일 선교사님이 협동목사로 도운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장기 협동을 하셨는데, 친해졌다 싶을 때 제게 충고를 해 왔습니다.

가장 많이 지적을 받은 것이 기도였습니다. 

평신도 대표 기도자의 기도만이 아니라, 저의 기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내용이거나, 

때로는 하나님에게 세상 정보를 알려드리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초등학생에게 하듯 깨우쳐 주려고 안달을 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무지한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겸손히 전하면 될 것을,

때로는 제 감정에 못 이겨서 하나님께 역정을 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책망하기도 하니 말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이 예배에서는 많고 많습니다. 

왜 예배 중에 일어나야 하는지, 왜 이 순서는 앉아서 듣는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 순서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갖게되고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얻으려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상해야 합니다.


둘째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의식에 뭔가를 첨부하려는 시도입니다. 

   제가 많은 의식교회 예배에서 발견한 문제점 중 하나는 의식문에 따라 예배드리기 보다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첨가하는 경향이었습니다. 

물론 예배란 남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개성을 살릴 수도 있고, 뭔가 새롭게 예배드리려는 시도를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양 교회들 대부분은 예배의식문을 정확하게 따르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배학자들은 한번 결정된 예배의식문은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의 예배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그걸 함부로 훼손할 경우를 염려한 것일 것입니다.

   가령 의식 예배에는 묵기도가 더러 나옵니다. 죄를 고백하기 전에 잠깐 묵기도를 가집니다. 

그런데 고요한 가운데 묵기도를 할 절호의 기회인데, 그 때 피아노나 오르간으로 반주를 연주합니다.

묵기도의 본래 목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는데, 반주에 나오는 가락이 마음을 점령한 때문입니다.

그 잠깐동안의 침묵을 참을 수도 기다릴 수도 없어서 반주를 끼워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감리교회에서는 예배의 말미에 복음가를 넣었는데 저는 그 노래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날의 예배를 망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 복음가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곡이었는데 3절까지 부르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노래의 가사와는 너무 다르게 살고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세상 등지고 살기로 했네x3 뒤돌아서지 않겠네."

심지어 이런 확신을 그 예배에서도 깨닫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초입에 <영광송>을 대신해서 평화의 인사와 함께 복음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는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 평화의 인사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부르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겹치도록 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영광송을 대신한 복음가 <평안을  네게 주노라>는 영광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바꾼 이유는 그 복음가가 마음에 와 닿는 감상적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예배를 부흥회 정도로 이해하는 가벼움이 큰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그 분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제게 목회실습을 하였던 분이라서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해서 설교를 하는데, 회중들을 어린 아이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설교에서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질문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예요?" 시종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할 설교 자리에서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설교는 교육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은 부흥회 같은 교육이나 전도 혹은 봉사 집회에서나 필요한 방법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또는 문제가 되는 것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교육은 따로 시간을 만들어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교육자료를 준비해서 회중들에게 제공할 일입니다. 

   저는 부흥회는 부흥회 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흥회의 가치를 결코 낮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책망하고 회개하고 결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다워야 합니다.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대전제가 바탕에 있기 때문입니다.

농담과 심지어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 말들이 예배나 설교에서 사용된다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 전 저는 생애 첫번 맞는 임직식을 코미디화하는 모습에 분개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한다는 감격과 결심을 갖게 할 중요한 자리가 우스개꺼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많은 뜻있는 분들이 현대 교회의 예배가 가벼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주일은 TV로 주일 예배실황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명한 목사일수록 예배를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실제로 그 성경구절들은 설교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거자료(proof text)에 불과했습니다.  

성경 구절은 그 자체로 특별한 삶의 자리(배경)을 가진 말씀입니다. 

그래서 쉽게 인용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를 근거로 성경구절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부탁합니다. 

부흥회에서는 이를 최대한 용납할 수 있겠지만, 예배에서는 지양했으면 합니다. 

설교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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