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90(2025. 6. 10. 화요일).

시편 119:115-117.

찬송 33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말이면 틀림없이 부르곤 하는 올드 랜 사인/ Auld Lang Syne은 스코트 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1759-1796)가 개작한 것입니다. 그는 6월의 꽃 <내 사랑은 빨간 장미꽃>에서, “그대 정녕 아름답다, 나의 귀여운 소녀. 이토록 깊이 나 너를 사랑하노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바위가 햇볕에 녹아 스러질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런데 장미는 곧 바로 시들어 버리는 것을 몰랐을까?

 

2. “호소하는 기도(15-64:9)”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런 호소하는 기도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님께 원인이 있고 책임이 있는 듯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무심한 체 한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15).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헤매도록 하셨고, 굳은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했다고도 항의합니다(17).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으셔서 문제들이 불거졌다고 책임전가까지 합니다(18). 마치 시험을 잘 보지 못한 학생이 시험문제를 가르쳐주지 않은 교수를 탓하는 꼴입니다. 건강을 잃은 자녀가 때려서라도 꼭 필요한 건강식을 먹였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투정하는 꼴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이런 원망을 되풀이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고난도 더러는 있습니다. 가령 태중에서부터 허약한 몸, 질병을 안고 태어나는 경우도 그렇고, 기형아로 태어나 평생을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제 생각으로는,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질곡에서 벗어나 희망 가득 찬 미래로 달려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 없이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심한 척하다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들만 골라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형편이 좋은데,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고집하느라 되레 힘들게 살아가는 처지를 보면서 그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듯 대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친구나 이웃의 꾐에 빠져 헛된 삶을 살게 된 것이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때려서라도 붙잡아 주셨어야 옳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1960, 1970년대에는 박태선의 천부교와 문선명의 통일교에 포섭되어 학교가 정한 규율을 어기고 반항하던 학생들에게 중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학생들 가운데서 옛 스승을 찾아와 이렇게 항변하더랍니다. “정말 스승이시라면, 밧줄로 묶어서라도 어리석은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핑계요 변명에 불과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기다리는 아버지/ 탕자의 비유>(15:11-32)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에 가득 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가 돼지우리에서 돼지의 짬빵을 먹는 고통을 맛보기 까지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훈계와 교훈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당신의 길을 잊지 않는 사람이 당신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64:4)고 말입니다. 그리고 뒤늦은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이며,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기 때문이라”(64:5)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적인 생각으로 돌아와 고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죄를 기억하지 마십시오.”(64:8)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9(2025. 6. 9. 월요일).

시편 119:112-114.

찬송 46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시인 프란시스 윌리엄 버어딜론(1852-1921)<사랑이 끝날 때>란 시가 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하나뿐.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하나뿐. 하지만 한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끝날 때에는유치찬란한 시처럼 다가왔지만, 태양이 저물 때, 세상은 절망의 어둠이 되었고, 사랑이 끝날 땐 한 평생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뒤에야 위대한 시라는 걸 깨달았다.

 

2. “은총을 회고함(7-14)”을 읽었습니다. 무애/無涯 양주동 박사께서 쓰신 <어머님의 은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짓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1930년대에 가사에 감동한 이흥렬선생이 곡을 붙였다고 하니까 가사는 그 보다는 조금 더 일찍 썼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1: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이 노래를 건성으로 불었던 것을 후회할 때쯤이라면 나이가 제법 들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은혜라는 용어는 매우 특별합니다.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작심/作心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해 보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큰마음을 먹지 않고는 부모님의 은혜나 스승님의 은혜를 되살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겠습니까? 이사야는 당연히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경험했던 일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땅 가나안에서 이런저런 시련을 겪었을 때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온갖 곤경에서 구해 주셨고.” “기나긴 세월을 하루 같이 안아 주셨다.”고 회상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거룩한 영을 그들에게 넣어 주셨고”,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넘어지지 않게해 주셨다고 술회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8년이 되어서야 동기생들 20여명은 옛 스승 내외분을 수소문해서 서울로 모셨습니다. 선생님 내외분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회 시간을 가진 후, 작은 선물도 드리고 노래도 부르며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예쁜 호텔에 하루 밤을 묵게 하시고, 이튿날 배웅까지 잘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몇 년 후에 선생님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셨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참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좀 더 말씨도 어눌하지 않게, 얼굴은 한껏 건강한 체 로션도 바르고, 옷도 깔끔하게 입어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54년 만에 찾아온 제자들이 전망 좋은 <5월의 꽃수레>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고, 좋아하는 가곡을 함께 불렀습니다. 5시간의 만남을 뒤로 하고 손을 흔들어 보내놓고, 이튿날 고마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항상 변함없는 그 모습 자체가 감사입니다.” 란 답글을 받고 좋은 기억으로 새겨진 것을 감사했습니다. 감사와 은혜가 실종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기억나는 선생님들이 여전히 많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8.

시편 119:109-111.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50년도 훨씬 전에 첫 번째 신학생 실습을 했던 옛 교회에서 제게 신앙지도를 받았다는 육순을 넘긴 초로의 할매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이냐 물었을 때, 엘리자베스 E. 디킨슨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대해가는 참새 새끼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헛되지 않은 삶은 아주 작은 관심과 배려만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2. 성령강림절의 행전 2:14-21을 본문으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재하실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베드로를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지를 똑똑히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두려움에 떨며, 무력감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역사 속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담대하게 세워주셨습니다(14-15).

우리는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지만, 매우 적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목자잃은 양떼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1:4).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숨을 죽이고 조용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마가의 다락방은 120명의 성도들이 지내기에는 매우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하셨던 말씀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셨고 거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렸는데, 뜨거운 불꽃과 강한 바람 속에 그들은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16).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과 완성이라는 준비된 내용이라고 말입니다. 1960년대 초반에 통일교회가 기승을 부릴 때, 그들의 전도자들이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존의 교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에게 붙잡혀서 난생 처음 시험에 들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구약/舊約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고 있고, 신약/新約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친다. 그러나 새 시대인 지금은(고전 13:12)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성약/成約의 시대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언의 말씀인 구약과, 성취의 말씀인 신약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17-21).

요엘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의 제9대 왕 요아스가 통치하던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에 등장하는 세례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한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너무 멀리 있다 생각하고, 가까운 곳에서 유혹하는 우상에 흔들려서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그 시대를 향해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야훼의 날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너희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예언을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언과 환상이란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절망과 두려움 한 복판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7(2025. 6. 7. 토요일).

시편 119:106-108.

찬송 26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또한 자기를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방법이 옳은 것일까? 남이 나를 이해해 주기 전에 내가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는 훌륭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이웃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데 보다 많은 힘을 기우려야 하겠다.

이승우, 1분간의 묵상, p.178

 

2.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다(1-12)”을 읽었습니다. 예배의식에는 6개의 영창/Canticle 이 있는데 그 중의 백미/白眉<영광송/Gloria in Excelsis>입니다. 이는 눅 2: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중심주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염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악한 세력과 넘어지기 잘하는 연약한 신앙인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이런 사람들 앞에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앙의 반전이 있다는 것이고, 신앙의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예언자는 얼굴을 땅에 엎드리고 있었는데, 야훼께서 영광에 싸여 동문 쪽에서 성전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자신도 야훼의 기운에 들려서 성전 안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성전 본관에는 야훼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다고 했습니다. 야훼의 영광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이 나도록 가리는 장벽들을 더 치워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훼 자신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들의 땀과 수고를 바라지도 기다리지도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와 긍휼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사랑이란 인간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무 조건도 인간의 가치나 노력에 상관없이 심지어 죄인에게까지 베푸시는 사랑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긍휼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끝없이 기다려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는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다함없으신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어느 대선 후보가 항일 독립투사들을 폄훼하면서 그들의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구해 준 것은 세계열강이었다고 망발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마치 주경야독하며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공부하는 젊은이를 발견한 한 부자 이웃이 장학금을 주어서 성공했을 때, 그 젊은이의 수고를 무시하고 장학금을 준 부자 이웃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청운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돕고 싶은 뜨거운 말음이 일어서 손길을 내 밀었던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무력하게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말과 전통 그리고 땅을 지키려는 그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가 1960년대 어느 날 저녁 무렵 경주의 한 시골을 지나가는데, 소달구지에는 작은 볏짐을, 그러나 농부의 지게에는 많은 볏짐을 지고 가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합니다. “소달구지에 타고 편히 가지 왜 달구지는 가볍게 당신 지게는 무겁게 짐을 지고 가십니까?” 그러자 농부는 그럴 수는 없지요. 나도 종일 열심히 일했지만, 소는 나보다 더 힘들게 일했는데, 서로 나누어짐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펄 벅은 이 나라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라 평했다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은 만국에서 통용하는 것 같습니다. 제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민족을 누가 손을 내밀에 도와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6(2025. 6. 6. 금요일).

시편 119:103-105.

찬송 9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팔방미인이 되려 하지 말라. 탁월함의 결함은 자신을 과용한 결과 오용한 데에 있다. 팔방미인이 되려는 노력은 역겨움을 산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지만, 매사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은 더 큰 불행을 낳는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결과 잃게 되고, 처음에 그를 원하던 모든 이의 미움을 사게 된다. 팔방미인은 드문 사람이라고 존경받지 못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26.

 

2. “내가 너희의 목자가 되리라(17-31)”을 읽었습니다. 건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 <알 라딘>이 있어서 가끔씩 들리는데, 두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하나는 <채근담>이고, 다른 하나는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며, 맹자를 버려라>는 고전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길(倫理)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 더 힘든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억지로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길인 윤리의 삶이란 이와는 많이 다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며, 몸으로 따라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어쩌면 억지로라도 실행에 옮기려고 기를 써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사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나 야훼가 몸소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의 영도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살다가 길을 잃을 때는 우리에게 보내신 목자에게 길을 묻고, 힘들고 괴로우면 우리의 하나님께 맡기면 되니까 말입니다.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떨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날그날, 그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 둘 하며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엊그제는 앞집의 내외분이 장대 톱을 들고 작업 모자와 장갑을 끼고 찾아오셨습니다. 저의 집과 당신들의 집 경계에 심어놓은 보리수나무가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열매를 맺었는데 그게 빨갛게 익으면 하나 둘 자기 집으로 떨어지는데, 제가 방치하고 있어서 뒷 마당이 붉게 물들어 치우는 게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가지치기를 해 주고 싶다 제안을 해 왔습니다. 요즘은 제가 채전과 나무 돌보기에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그리한 것입니다. 두 내외가 열심히 땀 흘려서 시원하게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는 일을 마친 후 테라스의 탁자에 앉아 살아가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17년째 살고 있다 말하니까, 자신들도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며 그래서 태양광 시설을 설치했다 말해 주었습니다. 그 날의 차담/茶啖은 좋은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앞뒷집이 서로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고, 오늘처럼 사과 몇 알들고 찾아와 주는 일이며, 소소한 일상이나 걱정거리를 나누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교회나 절 등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제가 목사라고 가끔씩 찾아와 인생 상담도 청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말동무를 해 주는 분들입니다. 좋은 이웃은 작은 관심과 배려만으로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브라우닝은 <피파의 노래>에서 마지막 구절에서 행복을 아침 중에서도 일곱 시,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처럼 맺히고, 종달새는 높이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화롭구나!”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과 함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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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5(2025. 6. 5. 목요일).

시편 119:100-102.

찬송 4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채근담/ 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이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날 때는, 곧 나만 못한 사람을 생각하라. 그러면 원망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이라도 게을러질 때는, 곧 나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하라. 그러면 정신이 저절로 분발하게 된다.”

 

2. “책임은 개인에게(1-4)”을 읽었습니다. 어느 교파 신학교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여러 외국 신학교를 전전했던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지인에 의하면, 그분은 성품도 온순하고 학식도 풍부했는데, 한 가지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지도하는 지도교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 분의 제자로 공부하고 학위 논문이 통과되기까지는 지도교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동양에는 연좌제라는 무서운 벌이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문공(文公) 20(주전 230년 경)에 처음으로 삼족(三族)에게 연좌 형을 행하고, 그 뒤 한나라 초에도 이삼족법(夷三族法)’이 있었는데, 삼족은 부모·처자·형제를 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는 약 360년 전인 에스겔 시대에도 이미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동서양이 잘못의 책임을 한 가족에게 3족까지 묻는 잔인한 법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예언자는 이런 잘못된 법에 맞서는 하나님의 법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잘못이 자녀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은 해당되는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는 이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며,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분명히 밝히며, 아들의 목숨이나 아비의 목숨도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죄 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인 양 전가하는 것은 어떨까요? 가령 소위 조상 탓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말입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죄책감과 죄 값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차제에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선배 목사님의 얘기였습니다. 봄 대심방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권사님이 자신의 집을 꼭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늘 바쁘게 산다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후 다과를 들면서 그 남편에게 교회에 나오실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자신은 매 주일 교회에 갔었다고 하더랍니다. 이 선배 목사님은 주일 예배에서 뵌 적이 없었다며 어느 쪽에 앉으셨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머리를 긁으면서 사실은 교회당에는 들어가지 않고, 골프장에 가면서 아내를 교회 정문에서 내려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에 나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가 아내를 가장 사랑하는 줄 아내도 알고 있는데, 날 두고서 혼자서 천국에 가겠습니까? 아내의 옷자락을 잡고서라도 함께 갈 생각입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합니다. “천국에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잡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선생님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교회에 오셔야 배울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자녀가 죗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해당자가 받는 것이며, 다른 누구의 손목을 잡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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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4(2025. 6. 4. 수요일).

시편 119:97-99.

찬송 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범선의 <오발탄>에 나오는 한 구절. “양심이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시입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는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그건 나이롱 빤쯔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요.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에 달린 리봉이라고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벌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 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자신을 조물주의 오발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2. “심판과 회복(14-25)”을 읽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보통이라든지 보편적이 라든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성골과 진골을 가리려고 발가락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은 도토리 키 재기는 지금도 변함없다는 것이 마음 아픈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체적인 바탕에 참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진짜 이스라엘은 누군지 따져보자는 흐름이 깔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간 사람들보다는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른바 정신 승리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8-11장의 내용은 예레미야 3324절 이하의 말씀과 너무 닮았음을 지적하는데, 그 중심점에는 유다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과 빨리 절연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는데, 결국은 그들이 남기고 간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해가는 판국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땅의 소유권을 두고 열불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15절에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그 땅의 적법한 소유자임을 자처하면서, 끌려간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라는 씻을 수 없는 자만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더러운 이방인의 땅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회복의 약속을 하고 계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과 약속의 땅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이 옛 소유를 다시 찾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맺는 완전한 계약 공동체가 회복도리라고 말입니다(17-18). 훗날 이사야 56-66장에서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을 때, 이 하나님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투쟁은 바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서 자주 경험하는 여러 종류의 실패와 고난인 하나님의 심판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어나도록, 그리고 몸에 박혀 있는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건강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본래의 생명체가 되도록 바꾸기 위함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를 가장 확실한 말로 회개라 할 수 있는데, 회개는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나,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이나 할 것 없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신해서 헛된 우상에 미쳐 날뛰던 옛 생활을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대선 후보로 나올 뻔 한 후보의 부인이 인터뷰한 내용이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처럼 보여서 아연실색하였습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는 점쟁이나 무당들을 찾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역술도 배우고, 손금도 배우고, 필요하다는 모든 것들을 배웠습니다.”고 말입니다. ! 그랬었구나! 어찌하여 장로나 목사 중에서도 점쟁이를 많이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그 답답한 심정들을 말입니다. 어제 정기 검진일이어서 건대병원을 다녀오는데, 놀랍게도 대학가에 가장 많은 것이 점술사와 타투 집들이었습니다. 장래운, 애정운, 사업운 등 등 궁금증이 수도 없이 많은데, 누구도 귀띔조차 해 주지 않으니, 얼마나 괴로울 것입니까? 그래서 도서관 보다는 그런 한 평짜리 점술사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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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3(2025. 6. 3. 화요일).

시편 119:94-96.

찬송 48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종종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자 역할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게 옳습니다. 총신대학교의 교훈이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라고 하는데, 저는 학자가 되라. 신자가 되라. 인간이 되라.”로 고치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인간이 되는 게 우리가 힘쓸 일인 때문입니다.

 

2. “끝이 가까이 왔다(10-15)”을 읽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끝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도 하고, 아쉬움을 갖기도 합니다. 기대 밖의 결과를 거둘까 두렵고 아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마지막 날, 그 끝날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보아라. 그날이 왔다. 이제 될 대로 되었다.”고 말입니다. 유명한 스페인 노래 <케세라세라>가 생각났습니다. Que Será, Será는 스페인어로, “될 대로 될 것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자조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가 아니라, 처음부터 되기로 한 대로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로마서 주석이 끝나는 날 책거리로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곤 했습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s what she said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거만한 자들이 활개를 치며, 폭력배가 학정을 펴고 있으니 망할 때가 되고야 만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뿐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과 슬픔은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하다거나,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로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세적인 심판입니다. 우리가 땅 위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심판인데, 그것은 염병과 같은 무서운 질병이며, 기근과 같은 재난이며,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으로 많은 생명들이 쓰러져 죽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밖에도 지진과 가뭄 그리고 기후 위기 등이 차례차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고대 이탈리아의 도시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서기 79년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현장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화산의 폭발로 사람들은 뜨거운 화산재에 묻혀서 산채로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화석으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폼페이는 포장된 길로 마차가 다니는 현대 도시였고, 상수도관이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었고 현대식 사우나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문명화된 도시였으나, 많은 집들의 벽에는 넘쳐도 한참 넘친 춘화/春畫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후 79년에는 아직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서, 교회당 건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심판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온 세상을 물바다를 만들어 엄청난 생명을 죽인 것과 같이, 앞으로 우리 인류가 마주할 재난을 성경은 불에 의한 재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 불구덩이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저주의 날에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변호해 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우리 주님을 앞세우고 그 뒤에 서 있는 성도들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자랑스러운 신앙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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