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4호(2025. 7. 4. 금요일).
시편 121:3-5.
찬송 320장(통).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엊그제 감상했던 미국 영화 <The Blind Side>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초겨울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남자 주인공 한 거구의 흑인 소년 마이크 오어를, 지나가던 여자 주인공 리 앤 투오이는 그를 차에 태워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줍니다. 이튿날 그 흑인 소년이 도둑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여주인공은 그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크리스천 정신으로 가족들(남편 션, 딸 콜린스 막내 제이 해드)의 동의를 받습니다. 여자 주인공 리 앤은 마이크를 뒷조사하는데, 12 명의 아이를 낳은 매춘부인 그의 생모를 어렵게 만나, 자신이 마이크를 입양해서 돌보겠다고 허락을 받습니다. 가정이 생겨 다시 학교에 가게 되는데,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는 게 없으니 선생의 강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시험지를 백지로 내기 일쑤여서 교사들 사이에서 가르칠 수 있겠는지를 토의합니다. 다행히 한 교사의 배려로 겨우 학교생활을 버티고 있는데, 그의 유일한 취미는 운동이라는 것과, 그가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상담사의 조언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미식 축구 선수가 됩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도서관에 들어서는 마이크를 쳐다본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그를 험담하는데, 입양 가정의 누이 콜린스가 비난하는 여자 애들의 테이블에서 일어나 혼자 큰 테이블에 외롭게 앉아 공부하는 마이크 옆으로 가서 책을 펴는 장면과, 새 어머니 리 앤이 생모를 만났을 때도, 그녀의 곁에 다가가서 앉아 얘기하는 장면은, 누군가의 옆 자리에 앉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여류 시인 매리 스티븐슨의 <모래위의 발자국/Footprints in the Sand>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2.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9-1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본래 자화자찬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고치기 위해 하신 비유였는데, 표제어처럼 교만한 사람의 대표 격인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그의 상대역인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는 기도 대결쯤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얼마나 편차가 큰 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두 사람의 기도는 태도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렸고, 그리고 틀림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비해서 세리의 기도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구석진 자리에서 기도할 뿐 아니라, 감히 하늘을 올려보지도 못한 채, 다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소리로 기도드렸습니다. 두 번째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내용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내용은 자기 자랑으로 시종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다던 지, 십일조를 떼먹지 않고 드렸다던 지, 욕심이나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리는 자랑거리나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태도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신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하시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시고 지적하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치려 하기는커녕,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 아무개 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자신이야말로 한경직 목사님과 김준곤 목사님 등등을 한국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물이라고 만천하에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이험 목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대형 집회를 여러 날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집회에서 1부 설교를 맡았던 신 아무개 목사는 “나는 5천명 앞에서 설교하신 예수님보다 200배가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다.”며, 부산 연합집회에서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전 아무개 목사가 제대로 배운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로부터 3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한국 개신교회가 하향곡선을 긋게 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신앙의 사람이라 인정한 사람은 철부지 같은 바리새파가 아니라, 세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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