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03.

시편 시 66:16-17.

찬송 30, 169,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삶의 배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보에시우스의 다음 시를 감상해 보시지요.

어떠한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은, 거만한 운명을 발밑에 깔고, 행운과 불운을 올바르게 쳐다보며, 그 얼굴 태연하게 보존할 수 있네. 태풍 휘몰아치는 바다의 광포도, 큰 입으로 화염을 뿜어서 흑연/黑煙에 뒤덮인 활화의 베시우스 산도, 드높이 솟은 저 탑 때려치는 천둥 번개와 벼락도, 그 마음 혼란시킬 수는 없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잘 것 없이 횡포스럽기만 한 폭군들을 무서워 떤단 말이냐보에시우스, 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 pp.30-31.

 

2. 성령강림절 주일의 구약 성경 에스겔 37:1-14을 본문으로 마른 뼈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을 직관하려고 합니다. 까닭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우리의 힘겹고 절망스러운 삶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절망 한 복판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인도하셨습니다(1-3).

설교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망가트리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밖으로부터 던져진 실패와 질병 등입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무관심, 무의미, 무감정, 무기력과 같은 것입니까? 밖에서 오는 외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기력과 무의미라는 내적 문제가 우리 인간을 서서히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묘지가 있었는데 소홀한 관리로, 무덤에서 뼈들이 솟아날 것 같이 황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몽골의 정신적 힘이었던 무당들의 사당 주변에는 동물들의 뼈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인도하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것은 절망과 죽음의 땅을 생명으로 바꾸시겠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절망은 희망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4-10).

마른 뼈들아, 야훼의 말을 들으라.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러자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고, 뼈에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명하시기를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그러자 모든 시체들이 제 발로 일어서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은 우리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생령이 된 것처럼, 절망과 죽음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자 새로운 생명들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른 뼈들에게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죽어 백골이 되었던 뼈들에게서 힘줄이 돋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고, 생기를 불어넣자 생명이 재탄생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11-1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른 뼈들, 절망의 골자기를 뒹굴고 있던 뼈들은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신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얼마든지 마른 뼈들로 절망 한 복판에서 뒹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 앞에는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고,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새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옛날 에스겔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절망과 슬픔 그리고 무기력과 무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의미 있는 삶으로, 감격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02(2024. 5. 18. 토요일).

시편 시 66:13-15.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학자나 목사가 아닌 한 평신도가 예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때부터 부활 승천할 때까지의 노정을 성경을 토대로 소설을 쓴 것이 <왕국의 비밀>이다. <벤허><쿼바디스>와 같은 유의 종교소설인데, 기독교 신앙에 이르는 또 다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소설의 주인공 마르쿠스는 부유하고 학식 있는 로마인으로서 예수님이 처형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의 죽음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가 정말 이스라엘 하느님의 아들인가? 그의 가르침은 무슨 뜻인가? 그의 왕국의 비밀은 무엇인가? 묻는다. 이런 물음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하고 부활을 체험하게 하며 참 부유와 고상한 삶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 마르쿠스는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분이 생전에 행한 기적을 추적해 가면서 이성을 초월하는 힘을 발견한다. 복수와 사랑의 쟁취를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간다. 왕국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멸시, 냉대는 모든 신자가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밟아나가야 하는 과정임을 일깨우며, 등장인물들의 모범은 메말라 가는 현대인에게 사랑을 일깨운다. '비밀을 알고 싶다.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언가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일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을 만나고 싶다.' 마르쿠스는 정처 없이 순례하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버림받은 땅 팔레스티나, 노예들의 땅, 이스라엘에서 만난 그 놀라운 인물, 잊을 수 없는 진리에 그는 인생을 걸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연인 예수에게 빠져 상상하지도 못할 삶에 자신을 던졌다. 그는 어느 때보다 행복했고 기쁨으로 온몸이 떨렸다.’

                                         M. 월터리, 왕국의 비밀, 성찬성 역, 1980. 바르톨로메오 신부 감상평.

 

2.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18-26)”을 읽었습니다. 현대 시를 활짝 꽃피운 소월/素月 김정식/金定湜<초혼/招魂>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망자/亡者가 된 옛 연인의 이름을 불러내는 시입니다. 그런데 무당들의 씻김굿을 할 때는 망자를 불러내어 평안히 저승으로 가기를 비는 굿을 한판 벌입니다. 망자가 이승에서 맺힌 한이 많아 집안이 형통치 않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행하는 것이 씻김굿인 때문입니다. 씻김굿의 효험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 사람들은 그런 굿을 한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은 딸을 살려주시라는 회당장이 등장하고,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열 두 해나 하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으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찾아온 여인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 과학시대에는 인간의 인체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병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을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고칠 수 있게 되었지만, 2천 년 전에는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무당의 주술에 의해서 병을 고치려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혈병(성경에서는 혈우병으로 번역)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으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았고, 마침내 병을 고쳤다는 신비로운 일화를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과학문명의 시대라는 지금도 난치병이나 불치병들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제 대학 동창은 지난 코디드 19을 겪으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전염성이 높다며 면회마저 못하고 장례식도 참석할 수 없었다는 비통한 현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습니다. 열 두해를 고생한 여인에게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자 노력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택한 방법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여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주님을 찾아 나온 것이고 그 희망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질기고 질긴 병에서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길잡이 노릇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 역시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시간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01(2024. 5. 17. 금요일).

시편 시 66:10-12.

찬송 3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이기는 싸움이 있는가 하면 지는 싸움도 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이기고도 지는 싸움이 있다. 허망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손변/孫抃 이라는 자가 경상 관찰사로 있을 때, 어느 집에 오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자 동생이 소송을 걸었다. 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동생에게 검은 옷과 검은 갓 그리고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권만 주고 나머지는 다 자신에게 물려주었다고 대답을 하며, 아버지가 남긴 문건까지 보여 주었다. 둘을 불러 사정을 들어보니, 당시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떴고, 누이는 시집을 갔고, 동생은 고작 일곱 살이었다. 손변이 말했다. “부모 마음이란 똑 같다. 시집간 딸에게만 후하고 어이없는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박하게 했겠느냐? 아들이 누이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재물을 나누어주면 동생을 잘 돌보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들이 자라면 이 종이로 소장을 써서 검은 관에 검은 옷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 관에 소송하면 바로잡아줄 것을 알고 이 네 가지 물건을 남겨주었구나.” 남매다 듣고 울었다. 유산을 반반씩 나누어 주었다. <역옹패설>에 나오는 얘기이다.            ’ 정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p.123-124.

 

2. “마태를 부르심(9-13)”금식에 대한 질문(14-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사자성어로 중인환시/衆人環視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중이라는 뜻인데, 요즘 정치인들의 언행을 온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현실과 맞아 떨어지는 사자성어/四字成語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의 하나로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세리는 요즘에는 세무직원에 해당되는 관리를 말하는데, 예수님 당시의 세리는 로마 식민통치자의 앞잡이로, 자신의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못된 관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문제시하며 질문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중략>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계획이 있어서 세리를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죄인들의 집합소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시사 하는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교회는 의인이 가는 곳이 아니다 라든지, 교회는 죄인들만 득실거린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인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시끄럽고, 교회가 문제가 많고, 교회가 세상보다 더 문제투성이다는 말이 정답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교회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변화된 모습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하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조선말의 김익두 목사님이 그 실존인물들이라 하겠습니다. 세리를 변화시켜 자기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게 한 것은, 훗날 탕자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깡패로 살던 김익두를 주의 신실한 일꾼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로 시작했으나, 주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00(2024. 5. 16. 목요일).

시편 시 66:8-9.

찬송 2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화의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으로 유명하다. 모든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이거나, 나와 그것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사물처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사물과는 구별하여 특별히 실존이라 규정한다. 종래의 인간 이해는 본질은 언제나 실존에 앞선다는 원리에 의해 이해되어 왔으나,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말한다. 비유컨대 인간이란 사물처럼 기성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미 결정된 방식에 따라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너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면전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제3자로 여기는 때문인지 비인격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쓴 책에서(찾으려고 애썼으나 결국 못 찾음),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본토인인 팔레스타인을 내쫓으면서 정복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대화의 철학자 마틴 부버도 역시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비단 부버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사랑을 강조하는 목사는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찬 설교를 하고 있고, 섬김을 역설하는 정치가는 지배와 명령을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 신학자는 알브레히트 리츌이다.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이 말 따로 행동 따로 여서 지탄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한번 말하려 할 때마다 세 번 생각하라는 삼사일언/三思一言이란 명구를 남겼을 것이다.

 

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1-8)”을 읽었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 취급하고 있는 내용인데, 5:17-26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집의 지붕을 벗기고 환자를 내려 보내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위급하거나, 주님을 에워싼 무리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배경을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를 마주하신 주님은 안심하여라.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곁에 섰던 율법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아신 주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용서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에서 어느 편이 쉽겠느냐?”고 말입니다. 용서받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 중에서 용서받았다는 말이 쉽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에게 똑같은 질문이 던져진다면, 저는 주저 없이 저는 두 가지 모두 어렵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최종적인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고,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사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사인 장기려 박사에게 질문한다면, 그분은 주저 없이 둘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항상 진료를 시작하면서 환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라고 했다 하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이런 기도를 드리는 의사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병원이 희망적이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가로 막고 있는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늘 불안하고 두렵고 잠 못 이루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마고 약속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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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9(2024. 5. 15. 수요일).

시편 시 66:5-7.

찬송 4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 문화에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아직도 우리나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고리타분하다거나 꼴통소리를 들어도 고칠 점을 잘 풀어간다면, 삼강오륜만한 자기 정체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덕목은 없을 것이다. 중국 전한/前漢의 유학자 동중서가 공자와 맹자의 학설을 기초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설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강오륜은 인간간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엄청난 가치를 말하고 있는데, 세상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알맞은 해석을 함으로 나름의 정체성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군신유의/君臣有義는 지도자와 백성들 사이에는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를, 지도자가 먼저 백성에게 신의를 보여야 한다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까?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아버지가 먼저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고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현실은 윗물이 흐려서 세상이 혼란스럽기만 한다.

    오래 전에 성탄절 선물을 고르다가 집어든 책이 <그래도/Anyway>라는 책이었다. 열 가지 역설의 진리를 설파하는 책인데, 그 첫 번째 역설의 진리로 사랑하라를 말하고 있었는데, 그 첫 장에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래야 나도 그도 서로 사랑할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완, 24. 5. 14.

 

2. “마귀와 돼지 떼(28-34)”을 읽었습니다. 가끔 사람의 정량평가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집니다. 오늘 본문의 평행귀인 막 5:1-15을 보면 약 2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 한 사람의 정신이 들어가자 강물에 다 빠져죽게 되었다고 했으니, 요즘 돼지 한 마리가 10만원만 해도 2억 원 정도로 값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덤가를 맴돌던 한 정신 이상자를 보신 주님께서 돼지 2천 마리에게로 그 귀신을 내쫓자 그들이 강물로 내달아 빠져주었다는 일화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혼란과 무질서한 삶에서 온전하게 돌아오게 하는 데는 무려 2억 원의 돈도 아깝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인 <레미제라블>162년 전의 작품이지만, 언제 읽어도 감동을 주는 것은 소위 개과천선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옥고를 치를 것을 걱정한 주인공 장발장은 자수를 하게 되는 한 인간의 파행/跛行을 택하지만, 우리들에게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선행과 가치로도 가늠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독재정권의 치적에도 불구하고 저울질 하는 것을 불허하는 이유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의 한 복판을 지나가는 우리들에게 마귀에 붙들려 제정신을 잃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과, 2천 마리의 돼지가 세상에 주는 가치를 저울질 해 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도 신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에 만났던 미국인 목사님은 62세에 은퇴를 하겠다고 준비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생 신학과 목회만 연구하고 힘쓰신 분이 어떻게 남은 40년을 살려하느냐는 물음에, 미국에는 주로 시골에 목사님 없는 교회가 많아서 언제든 설교할 수 있다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기독교의 역사도 석양의 해처럼 저물어간다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진리는 군계일학처럼 시련과 박해의 광야에서 더욱 돋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신숭배/物神崇拜라는 우상에 미쳐버린 현대 크리스천에게 돼지 떼의 제물이 없이는 회생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오늘은 저의 부친 58주기 추모 예배에 9남매 가족들이 저의 집에 모일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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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8(2024. 5. 14. 화요일).

시편 시 66:1-4.

찬송 5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글을 써 주는 대필자가 요즘은 흔한 직업군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엔 이런 대필자들 덕에 평생 문과와는 담을 쌓고 살던 이가 명문장이 담긴 글을 책으로 묶어 내는 일은 흔한 일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 나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글로 대신 써주는 대필자 노릇을 했다. 가령 논산 훈련소에서 탈영을 시도하다 발각 나 훈련소 중대장 사무실에서 구류를 살던 친구의 반성문을 대필한다던지, 오랜 시간 의병제대를 하고 가료 중이던 상이용사를 무시한 관리들을 통렬하게 꾸짖는 탄원서를 써 준다든지, 젊은 객기를 못 참고 잘못을 저지른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남한산성에 구류되어 있을 때 그를 위해 탄원서를 써 준 것 등, 참 많이 탄원서 반성문 심지어 연애편지도 대필해 주었다(군복무 시절로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대필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보람된(?) 일이었다 생각한다. 오늘 소개하는 조선 중기(?~1592) 이옥봉은 여류 시인이다. 그녀가 소도둑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는 이웃 아낙의 남편을 탄원하는 글을 부탁받고, 전후 사정을 글로 적은 후 시 한 수를 남겼는데, 다음 내용이다.

    ‘洗面盆爲鏡/ 세숫대야를 거울로 쓰고, 梳頭水作油/ 빗으로 물을 찍어 머릿기름처럼 바르는데,

若非是織女/ 이런 내가 결코 '직녀'일 리가 없는데, 何得問牽牛/ 어찌 (내 남편을) 견우라고 심문을 하시오.’

    당나라 이백의 시를 활용해 조선 여성 이옥봉은 기막힌 암시를 집어넣었다. 견우의 원래 뜻은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었다. 이 시를 읽은 관원은 소도둑으로 몰린 하인을 그 자리에서 방면하였다 한다. 해학과 재치 발랄한 한시/漢詩였다.

박성완, 24. 5. 12.

 

2. “예수를 따르려면(18-22)”잔잔해진 풍랑(23-27)”을 읽었습니다. 50년이 되어 모교를 방문하는 일은 감회가 남다른 일임에 분명합니다. 학장님과 부학장님이 기다려주셨고, 학교의 형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지원자가 변심을 한다며 걱정이 태산 같다 하셨습니다. 입학점수가 조금 낮은 학과에 들어왔다가, 1학년을 마치면 곧바로 자신이 원하던 학과로 전과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목회자가 목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원하는 전공을 택할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전과나 전학을 위해서 중간 환승 단계로 이용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복수전공 제도를 안내하지만 따르는 학생들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육사를 나와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을 더해서 목사가 된 분들도 있고, 문학을 하고 신학을 더 배워서 깊이 있는 시를 쓰는 분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시대는 융합형의 지도자를 선호하는 시대라니, 진로의 결정은 자기 몫이겠습니다.

    게넷사렛 호수에서 일과를 마친 주님께서 강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한 율법학자가 주님께 대답하기를,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겠습니다.”고 하자, 주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제자 중 한 사람의 다음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을 드리자, 주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것 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더 우선하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에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을 의미하며, 그들은 이미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삶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린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인격적으로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직을 받은 사람들에게 라는 점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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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7(2024. 5. 13. 월요일).

시편 시 65:11-13.

찬송 3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양과목 이수학점으로 <보건학>이란 과목이 있었는데, 강의 첫날 교수님은 앞으로 몇 주간 계획서 작성을 강의하겠다 말씀하셨다. ‘일일 계획서’, ‘주간 계획서’, ‘월간 계획서’, ‘연간 계획서’, ‘4년 계획서그리고 일생 계획서가 그 내용이었다. 훗날 그날의 강의가 공자의 삼계도운/三計圖云을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일생의 계획은 유년기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 一生之計 在於幼, 一年之計 在於春, 一日之計 在於寅, 어렸을 때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게 되고, 새벽에 일어나지 아니하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없게 된다/ 幼而不學 老無所知, 春若不耕 秋無所望, 寅若不起 日無所辦

   박성완 공저, 연세 내 젊은 날의 둥지, 영원한 마음의 고향, p.81.

 

2.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예수(5-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백부장과 하인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흔히들 백부장과 예수님에게 초점을 두는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백부장의 하인에 대해서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주후 1세기의 신분제도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조선 시대에도 이미 신분제도가 있었으며, 신라시대에는 매우 구체적인 사회계급제도가 정착하고 있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양천제(양인과 천인), 반상제(양반과 상민)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양반 계층은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천민 상민은 처음부터 벼슬길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양반들은 천민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해서 그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은 듯한 경향이었습니다. 이런 하인이 불치병인 중풍병이 들어 그를 살려주십사고 주님께 탄원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인은 주인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당시 사회적인 평가를 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 아무리 재주가 남다르고 충성심이 크다 해도,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할만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다 생각되는데, 백부장은 그를 위해 기꺼이 주님께 간청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인은 몸 둘 바를 몰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백부장이 주님께서 병자에게 가시겠다는 걸음을 막아선 일입니다. 이유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황망하고 방자한 말이 어디에 있을까요? “어서 오십시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감격하며 앞장서야 옳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다음 말이 특이합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기도 하지만, 또 제 수하에는 부하들이 있어, 저리 가라 하면 가고, 이리 오라하면 오는데, 주님께서도 말씀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믿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속성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하듯, 여기도 저기도 만져주시면 낫겠다고 요청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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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6.

시편 시 65:9-10.

찬송 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학생시절에는 강의실을 지키고 도서관을 지킨다는 갸륵한(?) 생각에, 거의 매일 치러지는 학생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김누리 교수는 이런 나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일침을 놓는다. “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는 내맡길 수 있지만, 독립적인 자신은 꼭꼭 숨긴다는 말입니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p.34.

 

2.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온 세상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하나 됨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 됨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 됨에는 많은 간극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 됨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 됨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 됨의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18:34, 5:29).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 됨이란 통일된 하나(unification)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처럼, 이념적인 동조 내지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은 엉터리입니다. 민주주의에도 공산주의에도 수백 수천가지의 다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통일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있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몸처럼 백체를 가진 인간의 신체에서 하나를 뽑아냈을 때를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하나는 동일한 백가지 물건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삶을 온통 흔들어놓을 정도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신뢰하기 위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의 가치와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가령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깨닫지 못할 때 말입니다.

 

두 번째는 다양성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었습니다(11-14).

주님을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살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관심사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삶의 내용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업 후 50년 만에 모교를 방문했는데, 학교 책임자들이 학교운영이 어렵다며 아이디어를 부탁하였습니다. 신학 훈련은 목회자가 되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목회자만이 아닌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형편도 능력도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기본이 되는 신앙훈련을 잘 길러줄 수 있다면, 어떤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그 정신으로 세상을 위해 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신은 바탕이 되고 다양한 능력으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융합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15-19).

한때 머리가 좋은 S대학 출신들을 기피하는 기업체가 제법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은 잘하는데, 종합하거나 아우르게 하지를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편 가르기하고, 대립하게 하며, 싸우게 하는 악마들이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하나 됨이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고물 없는 떡덩이처럼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독일인 로마 가톨릭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성주간 금요일(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에는 우리 모든 기독교회들을 떡메로 내려쳐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저도 감동을 받아서 함께 성주간에 강단교류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다름을 선용한 거대한 힘으로 섬김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분명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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