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89(2024. 11. 21. 목요일).

시편 92:13-15.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뉴욕 출신의 배우이자 가수 작곡가인 일카 체이스(Ilka Chase)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어느 덧 지나간다. 그러니까 견딜 만하다.” 사람들은 역경을 이기고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라는 속내를 비치고 있습니다. 까닭은 우리 인생이란 참고 견디지 않으면 잠시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다(20-27)”을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이 있는가 하면, 가장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가장 쉬운 일이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라니 아이러니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래도 쉬운 일은 설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쉬운 설교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 것을 매일 깨우치고 있습니다. 1974년부터 전임 전도사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시작해서, 한 주간에도 10번 이상 설교 준비를 해 왔으니까, 그 세월이 50년 계속 진행 중이니, 그게 맞는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하루에 달랑 묵상자료 한 편을 쓰는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제가 숙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회개를 촉구하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붙인 제목처럼 인간은 회개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외람되긴 하지만, 그 과제들이 서로가 떠맡은 과제들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을 저지르는 존재라는 말이며, 그래서 회개는 응당 서둘러 해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우리들 인간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쉽게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 꾀병을 핑계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돌아온 아내에게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하셨어?”라고 묻자. “회개하라고 하십디다.” 라고 대답하자, “누구 들으라는 설교야?” 라고 하니까, “당신이지 누구겠어.” 하더랍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제 구실하며 살자는 말도 그렇습니다. 과연 인간 구실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짓는 일에서 손을 떼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가끔 저는 이런 망측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배알이 없으신 분이실까? 하고 말입니다. 하루는 어느 전도사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도대체 인간을 왜 사랑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넘치고 넘치는 사랑인 은총까지 베풀어 주시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 대답은, “그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어요?” 정말 모처럼 신통한 대답을 했다 지금도 그리 생각합니다. 어땠습니까? 자식이 미울 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런 자식이 더 불쌍해지고 더 사랑을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부르짖는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15-17). 그리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 불쌍한 생각이 드시어 이렇게 대답하셨다.”(18) 고 말입니다. “흙아, 두려워 말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짐승들아, 두려워 말라. 들판의 목장은 푸르렀고, 나무엔 열매가 열렸다.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 하나님께 감사하여 기뻐 뛰어라. 너희 하나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 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 주시리니,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도 갚아 주시마 약속하신 것입니다. 메뚜기, 누리, 황충이, 풀무치가 먹어 치운 햇수를 세어 갚아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대국/大國이라고 기세등등하게 으스대던 나라들을 한낱 메뚜기와 황충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아뢰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따르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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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8(2024. 11. 20. 수요일).

시편 92:13-15.

찬송 2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스칼(1623. 6-1662, 8)은 프랑스의 수학자 신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등 많은 업적은 물론 명언도 남겼습니다. “마음속에 공허감이 있다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필요를 강조하고 강조하였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위해서 만든 파스칼의 노름(Pascal’s Gambling)에서는 하나님과 영원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무한대의 가치를 누리는 사람이라는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2. “돌아오라(12-19)”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론적인 해석자를 신학자라고 부르고, 생활을 위한 해석자를 설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두 해석자들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밝혀서 전달하는 소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두 해석자들은 부단히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고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때 신학이 보급되기 전인 초창기의 기독교회에서는 많은 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도행전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세례를 예로 들면, 상당기간 동안 교회는 물세례만을 가르치고 시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해서 가르쳐야 했고, 또 실행에 옮겨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적어도 초대교회 안에서는 약 400년 동안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관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심을 포함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 28:20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자구/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에서 통전적(integrity)으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원대한 목적에서 기록되었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고, 예수는 구약이 예언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라는 신앙 체계를 확립한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용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중요한 용어 회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라는 용어인데, 이 용어가 제시하는 개념은 처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시궁창을 향해서 달려가던 사람이, 그 썩은 시궁창에서 돌아서서 푸른 하늘을 향해서 제자리로 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의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거짓과 불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고 복을 내리실지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시온산에서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노인들과 어린아이들도 모아들이라고 합니다. 신혼부부도 신방에서 나오고, 제사장들도 울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빌라고 하십니다. 이런 회개는 그동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다시 얻게 되는 많은 선례/先例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의 요청을 하셨고, 그 다음 하나님의 은총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자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하릴없이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나 축복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만을 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인간이 할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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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7(2024. 11. 19. 화요일).

시편 92:10-12.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민기(19513- 20247) 1971<그날>이라는 소박한 노랫 말과     가락을 만들었습니다. “꽃밭 속에 꽃들이 한 송이도 없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싸움터에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마음속에 그님이 돌아오질 않네. 오늘이 그날일까 그날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그날이.” 후렴이 본문보다 세배나 긴 매우 낯선 가사입니다.

 

2.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애곡2(13-2:2)”을 읽었습니다. 농사를 망친 농부들이 걱정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철부지 어린 것들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니,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전에 드릴 곡식도 포도주도 모두 떨어졌으니, 슬피 울고 통곡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런 한 두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을 외치는 이들이 생각보다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나 곡해는 유대교 신앙 혹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초가 부실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농부들이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란, 추수한 농산물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로 따진다면 수확한 곡물의 10%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확한 곡식이 전혀 없었다는 비참한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장애인 교회와 정상인 교회 두 곳인데, 교인 수는 1 : 3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의 교회들의 재정 형편을 넘겨짚어 보면, 교인 수에 비례해서 1 : 3 정도가 되어야 정상일 텐데도, 실제는 반대라는 말입니다. 장애인 교회가 재정 형편이 건전하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3명이나 되지만, 모두가 자비량입니다. 재정 관리를 평신도 중에서도 장애인들에게 다 맡겼다고 합니다. 교인 분포는 장애인과 정상인이 1 : 2 정도 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많은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드릴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농사를 망친 사람들을 주목해서 바라봅니다. 마땅히 슬피 울고 통곡해야 할 사람들이 사실은 아직은 농사를 망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제들에게 명령하십니다. 단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소집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입니다. 단식(斷食/ 혹은 금식)하는 까닭은 온전히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동/擧動하실 날이 눈앞에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오시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실 하나님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칭찬과 은총을 주시는가하면, 이와는 정 반대로 채찍과 저주의 말씀을 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찾아오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 것 같습니까? 요엘 선지자는 그 날에 들려올 아비규환의 소리를 정리했습니다. “야훼여, 내가 부르짖습니다. 들판의 목장이 타 버렸습니다. 벌판의 나무들도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 물줄기들은 모두 마르고, 들판의 목장도 다 타버려, 가축들이 벌판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시온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두렵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야훼께서 거동하실 날이 왔다. 어둡고 음산한 날, 짙은 구름이 덮인 깜깜한 날, 산들이 까맣게 수도 없이 많은 무리가 덮쳐온다.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천만대에 이르도록 다시없으리라.” 곡식만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목장의 풀들도, 그 풀을 뜯어 먹어야 할 가축들도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 저주의 날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사랑가득한 날, 기쁨 가득한 날, 그리고 감사 가득한 날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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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6(2024. 11. 18. 월요일).

시편 92:7-9.

찬송 2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홍자성과 환초도인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채근담菜根譚>은 전편 222, 후편 135조로, 인간의 절실한 고민과 해결을 담은<채근담>은 그 어느 고전보다 쉽고 단순하게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인생 지침서이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전한다. “남의 허물은 용서해야 하지만, 자기의 허물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가? 언제든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피자는 뜻이 아닐까?

 

2.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애곡(1-12)”을 읽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표제어로 울어라!” 라고 붙였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다음 추수 때까지 굶주려야 했기에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요? 아마도 제 또래 쯤 되시는 분들은 대부분 경험했을 보릿고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50년대 60년대 초까지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세끼 밥이 전부였고,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해 칭얼대는 철부지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농사를 망쳤다고 할 때, 그 부모들의 마음은 한 없이 서글프고 힘겨웠을 것입니다. 가령 저와 같이 9남매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 한다면, 불평도 늘어놓았을 것이고, 이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른들은 야단을 치거나 회초리로 입막음을 했을 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고구마의 크기로 형제들에게 식사량을 정해주시던 어머니께, “엄마, 나도 큰 것 먹을 수 있어.”라고 점잖게 불평을 하기라도 하면, “네 형은 영어를 배우니까 많이 먹어야 하는 거야. 너는 아직 힘든 공부를 하지 않지 않니?” 라고 타이르시던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여든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엘서를 기록했다는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로 소개되는데, 요엘서는 적어도 주전 830-350년 사이의 광범위한 연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릴 심판은 여러 종류의 곤충들에 의해서(팥중, 메뚜기, 느치, 황충) 차례로 곡식의 잎을 갉아먹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백성이 저지른 죄의 값이었습니다(2-4). 외국 군대가 쳐들어 와서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말씀합니다(5-7). 그리고 어린 시절에 정혼해 두었던 사내가 죽어서 처녀가 검은 상복을 입게 되리라 말씀합니다(8). 곡식과 포도주 등을 성전에 드릴 수 없어서 제사장들도 걱정과 근심에 고개를 떨구고 있으리라 말씀합니다(9). 죄의 값은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과 희망을 앗아간 것입니다(10-12).

    북왕국 이스라엘의 13대 왕 여로보암 2세 때처럼, 영토가 넓어지고, 풍요와 번영의 시대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도덕적인 타락과 우상숭배가 더욱 더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 중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가난과 배고픔의 시절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좀 도둑은 왕성할지 모르지만, 패륜과 정의롭지 못한 대형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는 이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한 번영의 축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부패로 썩은 냄새가 도처에서 나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맡긴 야훼 하나님의 신탁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값은 반드시 물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관한 제1인식인 두려움의 대상을 끝없는 사랑의 화신으로 희석시킨 시대인식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죗값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리를 향해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삶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임을 자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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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5.

시편 92:4-6.

찬송 48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전에 반항의 아이콘으로 불린 천재 예술인 제임스 딘(1931.2-1955.9), 자신의 죽음을 알기라도 한 듯 남다른 명언을 남겼습니다. “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제임스 딘은 실연의 괴로움에, 술과 카 레이싱에 심취하였고, 결국 레이싱 사고로 24살의 짧은 삶을 마친 것입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인은 종교적인 문제였다고 합니다.

 

2.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둘째주일로 복음서 막 13:1-13을 본문으로 종말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대한 3가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임박한 종말, 둘째는 실현된 종말, 셋째는 미래적 종말이 그것들입니다. 모두 다 맞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맞게 될 죽음이 임박한 종말입니다. 종말을 체감하고 사는 삶이면 실현된 종말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파국의 날이 미래적 종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셋째 종말만을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우주적 파국인 셋째 종말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고 말씀합니다(3-8).

하나님의 성전을 떠받히는 돌들이 다 무너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전을 방문한 한 시골 장로님은 영원한 만세반석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전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때문에 하는 헛소리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그보다 더 화려한 성전도 불가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싶은 자리는 결코 화려하고 웅장한 그런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암시하셨는데,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며 불쌍히 여기는 청결한 마음들과 화평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 그리고 의를 위해서 박해를 감수하는 사람들 곁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나라이며, 우리 주님은 그런 나라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않을 바벨탑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 하십니다.

 

두 번째 종말의 현장은 미움과 다툼이 들 끊는 세상 한복판입니다(9-13).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좌정하시는 상태를 실현된 종말쯤으로 생각했습니다. 백번 옳은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을 사랑과 공의 그리고 평화가 넘치는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크게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사람들을 법정으로 넘겨주고 성전으로 불러들여 매질을 하며, 형제가 형제를, 부모가 자식을 죽는 자리에 내어주며, 주님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이 미움과 곤욕을 치르는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애타게 찾는 현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너무 가득하여서, 오직 하늘만을 올려다 볼 뿐이고, 오직 주님 도우심만을 구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 주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끝내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시간과 장소를 자질 수 없을지 모릅니다. 눈먼 사람들의 아비규환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모시는 사람들만이 누릴 은총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적합한 때와 자리는 지금 여기입니다(1-2).

종말의 인식은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느 날인가 불현 듯 의미를 묻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기초적인 물음에서부터,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는 끝은 무엇인가? 같은 거시적/巨視的 질문으로 발전할 때가 우리의 생각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젊은 날의 의미를 찾던 질문들은 답답하고 암울했던 현실을 극복하는데 큰 위로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석양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의미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의 출구가 없다는 이른바 곧 이르게 될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이 그것입니다. 하나 둘 가까운 이웃들이 우리 곁을 떠나갈 때,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을 죽음이라는 종말을 성실하게 준비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성전의 돌 하나도 다 무너지리라는 깨달음 앞에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584(2024. 11. 16. 토요일).

시편 92:1-3.

찬송 2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3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국의 배우 조지 알리시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겸손은 인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주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지혜이다.” 겸손이란 자신감이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며, 혼자서는 완벽하게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뜻이라 합니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는 이웃에게 부탁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시온에서 부르는 기쁜 노래(14-20)”을 읽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 해발 765m 의 언덕을 가리키는데, 바위 산성 등을 뜻하는 말로, 그곳에 다윗 성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과 시온 산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의 별명처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바벨론 포로 70년 이전에 활동했던 예언자로, 하나님의 현세적 심판은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착한 일을 하고, 제구실을 잘 할 때는 사랑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는 채찍을 내리신다고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삶에서는 틀리지 않은 말이라 하겠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신앙인이 뒤늦게 철이 들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와 같은 철부지를 사랑하십니까? 백번 천 번 죽어 마땅했는데 말입니다.” 그때 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행들, 기특한 짓도 하기도 하고, 못된 짓을 더 많이 하기도 하는데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까닭이 우리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의 넘치고 넘치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서 큰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시각으로 오늘 본문을 살핀다면 몇 가지가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께서 원수를 쫓아내셨으니 마음껏 기뻐하라고 하십니다(14). 둘째는 야훼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라 하십니다(15). 셋째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네 안에 계시니 기운을 차리라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어리석게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듯 하나님께 무엇을 해서 잘 보이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사랑의 행동 때문에 우리의 삶에 기쁨이 충만해지고,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지고, 기운을 차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힘써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는 비가 오는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입김이 보이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를 보일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은 한 번도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재수/再修가 아니라 7/七修를 한 다음에 비로소 그 사랑을 뜨겁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언제나 똑같은 사랑의 무게로 제 어깨를 감싸 안아 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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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3(2024. 11. 15. 금요일).

시편 91:15-16.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는 <제가 만일> 라는 엘리자베스 E. 디킨즈(1830.12-1886.5)의 시입니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름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다해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삶의 의미를 거창한 데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2. “살아남은 이들이 돌아오리라(8-13)”을 읽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원자폭탄 실험이 계속되고, 협박성 쓰레기 풍선도 저녁 하늘을 타고 내려오고, 전쟁의 포화소리는 실시간 방송매체를 통해 들려올 때면, 이러다가 세계 3차 대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런저런 화풀이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인도로 차를 몰고 돌진하는 계획적인 살인 차에 언제라도 희생될 수 있는 그런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총기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여서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죽을 일은 없다 합니다. 죽음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삶의 의미가 아득해 지는 것은 여전히 신앙심이 부족한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읽고 믿는 사람으로서 항상 감격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싶을 때에도 또 다른 숨통을 여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또 하나의 문을 열어두신다.”는 명언을 남겼다는데, 절망의 한 복판에서도 또 다른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저는 <남은 자 사상>이라는 말씀을 배운 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자 사상>은 구약성경에 줄기차게 나오는 사상으로,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또는 거룩한 씨(6:13)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계속 진행시키시며, 마침내 완성하신다는 중심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떤 시련과 역경 앞에서도 진행되고 마침내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 교리를 집대성한 바울 사도는 남은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밝힙니다(9:27, 11:5).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지은 죗값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7일 대통령의 담화와 기자회견에서처럼, 우리 인간은 참 뻔뻔스럽고 흉악한 민낯을 가졌음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비난하는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다만 죄인들끼리라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며 살자고 서로 권고 독려하는 게 낫다 해서 하는 비난이며 추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으면서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벌하시고는 엉뚱하게도 에티오피아 강 건너편으로 추방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 당신을 예배하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날이 오면다시 말하면 야훼의 날이 오면, 너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괴롭히며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던 자들을 너희들 가운데서 쓸어버리고 거룩한 성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테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남은 자들을 너희 가운데 두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가난한 자들이며, 남을 속일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르는 이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장 힘센 사람이라고, 가장 똑똑한 인재라고, 가장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가장 앞자리에 가장 높은 단상에 서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 믿고, 기도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남을 속일 줄 모르며, 거짓말이나 간사한 혀를 놀려 사기 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만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이라고 말입니다.

 

3. 어제는 하루 종일 수능시험장에서 문제를 푸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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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582(2024. 11. 14. 목요일).

시편 91:13-14.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G. K. 아뿔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라는 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사랑은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흘러가는데, 나는 이곳에 머무르네.”

 

2.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벌이 내리리라(1-7)”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부모의 훈계와 꾸지람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저절로 도덕이나 윤리를 배울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먹을 것이 귀했던 때라, 학교가기 위해서 마을마다 아이들이 모여서 학교로 갔는데, 그 모이는 자리가 한약방 앞이어서 철조망 울타리에 얇게 자른 모과를 말리려고 꽂아두었는데, 아직 다 마르기 전에는 달콤한 맛이 있어서 많이 빼 먹었던 기억이 나고, 하교 길에 남의 무 밭에서 미국 무라고 길게 자란 무를 뽑아서 먹었던 기억들, 그리고 야경을 서려고 집에서 가져가야할 나무 한 다발을 야경 방 앞 나무 장사꾼이 말리고 쌓아두었던 나무 더미에서 훔쳐 불을 땐 기억들이 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감자 서리, 수박 서리에 나섰던 기억들, 그리고 군인이 되어 밤마다 선임자들의 지시에 따라 전차 훈련장 부근의 배서리 그리고 수박서리를 본격적으로 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어느 핸가는 겨울맞이로 내부반 난로를 설치하는데, 나무며, 철사며 심지어 함석까지도 마을 주민들의 대문까지 뜯어다가 했던 일들이 아름답게(?) 추억됩니다. 그러니까 군인 시절에는 민간인 교회 무자격 전도사까지 하던 주제에 그런 도둑질까지 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예외 없이 벌이 내길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논고가 듣기에 매우 험악합니다. “저주받을 도성아, 더러운 도성아!”라고 시작합니다. 그 까닭은 야훼 하나님께 반항하고, 압제를 일삼고, 불러도 듣지 않고, 징계를 해도 코웃음만 치고, 제 하나님 야훼를 멀리하고 의지하지 않는다고 그 이류를 밝힙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무서운 저주를 퍼 붓습니다. 판사들은 벌판을 휘젓는 늑대들처럼 사람들의 뼈까지 씹어 삼키고 있으며, 에언자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고, 사제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말씀을 짓밟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잘못을 아침에 뜨는 해처럼 밝게 비추어주시지만, 죄인 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그 민족의 뿌리를 뽑겠다 하시는데, 성읍 모퉁이의 망대를 헐어버리고, 성읍들은 사람들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돌무더기가 되게 하며, 거리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드시겠다고 말입니다. 너만은 나를 공경하고, 너만은 징계를 제대로 받고, 너만은 하나님의 벌을 잊지 않으려니 했던 기대와 신뢰를 다 잃어버렸다고 말입니다. 믿었던 돌에 발등 찍힌다는 옛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 12일 천안 백석대학교에서는 한국 기독교 교회연합총회가 주는 한국교회 대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16명의 수상자들 중에는 제5공화국 쿠데타 주역이 모인 12.12사태 기념식 자리에(2019. 12. 19) 참석해서 전두환을 향해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한 김아무개목사도, 학력 위조가 밝혀지면 사표를 쓰겠다던 약속을 저버린 오아무개 목사도 들어 있다 해서 한국 개신교회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소위 성공한 사람에게는 모든 죄에서 면죄부가 주어지는 현실이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오피니언 리더 140명의 의견은 도덕성 회복에 58.6%, 기독교 본질회복에 77.9%를 표했다 합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의 현실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한참이나 결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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