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4(2025. 7. 4. 금요일).

시편 121:3-5.

찬송 32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엊그제 감상했던 미국 영화 <The Blind Side>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초겨울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남자 주인공 한 거구의 흑인 소년 마이크 오어를, 지나가던 여자 주인공 리 앤 투오이는 그를 차에 태워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줍니다. 이튿날 그 흑인 소년이 도둑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여주인공은 그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크리스천 정신으로 가족들(남편 션, 딸 콜린스 막내 제이 해드)의 동의를 받습니다. 여자 주인공 리 앤은 마이크를 뒷조사하는데, 12 명의 아이를 낳은 매춘부인 그의 생모를 어렵게 만나, 자신이 마이크를 입양해서 돌보겠다고 허락을 받습니다. 가정이 생겨 다시 학교에 가게 되는데,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는 게 없으니 선생의 강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시험지를 백지로 내기 일쑤여서 교사들 사이에서 가르칠 수 있겠는지를 토의합니다. 다행히 한 교사의 배려로 겨우 학교생활을 버티고 있는데, 그의 유일한 취미는 운동이라는 것과, 그가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상담사의 조언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미식 축구 선수가 됩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도서관에 들어서는 마이크를 쳐다본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그를 험담하는데, 입양 가정의 누이 콜린스가 비난하는 여자 애들의 테이블에서 일어나 혼자 큰 테이블에 외롭게 앉아 공부하는 마이크 옆으로 가서 책을 펴는 장면과, 새 어머니 리 앤이 생모를 만났을 때도, 그녀의 곁에 다가가서 앉아 얘기하는 장면은, 누군가의 옆 자리에 앉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여류 시인 매리 스티븐슨의 <모래위의 발자국/Footprints in the Sand>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2.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9-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본래 자화자찬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고치기 위해 하신 비유였는데, 표제어처럼 교만한 사람의 대표 격인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그의 상대역인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는 기도 대결쯤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얼마나 편차가 큰 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두 사람의 기도는 태도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렸고, 그리고 틀림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비해서 세리의 기도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구석진 자리에서 기도할 뿐 아니라, 감히 하늘을 올려보지도 못한 채, 다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소리로 기도드렸습니다. 두 번째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내용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내용은 자기 자랑으로 시종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다던 지, 십일조를 떼먹지 않고 드렸다던 지, 욕심이나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리는 자랑거리나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태도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신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하시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시고 지적하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치려 하기는커녕,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 아무개 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자신이야말로 한경직 목사님과 김준곤 목사님 등등을 한국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물이라고 만천하에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이험 목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대형 집회를 여러 날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집회에서 1부 설교를 맡았던 신 아무개 목사는 나는 5천명 앞에서 설교하신 예수님보다 200배가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다.”, 부산 연합집회에서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전 아무개 목사가 제대로 배운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로부터 3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한국 개신교회가 하향곡선을 긋게 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신앙의 사람이라 인정한 사람은 철부지 같은 바리새파가 아니라, 세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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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5.

시편 121:6-8.

찬송 5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대공황시절, 하루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각하께선 걱정스럽다거나 초조할 때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히십니까?” 대통령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기자는 의외라는 듯 다시 질문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께서 휘파람 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데요?” 그러자 대통령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죠. 난 아직 휘파람을 불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경기침체로 불안에 떠는 국민에게 아직 미국은 끄떡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동엽, 잊혀진 질문, p.44.

 

2.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15-17)”, “부자 청년-낙타와 바늘귀(18-27)” 그리고 여러 갑절의 상(28-3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십여 년 전에 중국 청도에 있는 삼자교회/三自敎會(自治-自養-自傳)에서 젊은 목회자들을 위해 성경 강좌를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십 여명 남짓한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첫날 강의를 마치고 쉬고 있었는데, 한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500여명이 넘는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고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장로님들의 파워로 생활고를 하고 있다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목회자 가족이 굶지 않을 정도로 박봉/薄俸을 받는다 했습니다. 목회자가 가난해야 기도에도 열심이고 목회에도 충실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때 서울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숭의여학교 강당을 빌려 개척교회를 했던 김동호목사는,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써서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청빈/淸貧이 아니라 청부/淸富의 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4부의 목차는 이렇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라. 세상의 불평등을 치유하는 부자가 되라. 하나님을 위하는 부자가 되라. 하나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부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유대 지도자가 주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고, 주님은 율법을 잘 지켰느냐 되물으셨을 때, 그는 잘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진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부자가 크게 근심하는 것을 보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천 투데이>의 마크 우드는 다음과 같이 칼럼을 썼습니다. "성경은 부/에 대해 매우 현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부에 대해 폄하하지 않는다. 구약을 보면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최소한 걱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면서,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富者가 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물론 부에 따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우드는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부자가 되기 원한다고 설교하는 '번영 설교자'들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며, 사람들을 매우 타락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드시지 않으셨다. 성경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부를 좇지 말며,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부와 부자 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으며, 예수님에 이르러서는 냉담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을 읽고 따르는 교인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반된 현실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의 깊은 뜻을 추론하면, 부자 됨의 문제는 그 부를 축적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부의 축적은 타락에 이르고, 자만심을 배가하고, 주변의 약자에 대한 냉담함과, 결국 하늘 시민답지 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농지를 가진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고 산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자신의 농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했고, 인세까지 빈자들에게 나누려고 하자 아내와 크게 다투고 그 길로 가출/家出, 한 작은 간이역에서 동사/凍死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근거할 때, 성실히 일해서 얻은 부라면 잘못이 없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부/때문에 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니 그게 큰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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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3(2025. 7. 3. 목요일).

시편 121:1-2.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허공으로 화살을 쏘았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너무도 빨리 날아갔기에 눈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네. 나는 허공에다 노래를 불렀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만큼 누군들 날쌘 눈을 지닐 수 있을까? 먼먼 훗날 참나무에 박힌 부러지지 않은 그 화살을 찾았네. 한 친구의 가슴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있는 나의 노래도.” H. W.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를 옮겨보았습니다. 우리들 삶이란 헛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과부와 재판관(1-8)”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대법원의 재판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재판을 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관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법은 공정성을 잃고 사법부의 위상은 크게 흔들릴 수 밖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재판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 굽은 판결을 내리는 그런 재판관 말입니다. 왜 이런 위인들이 존재할까요? 악은 왜 존재할까요? 하나님께서 눈을 감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못을 하는 사람을 학교 선생님이나 아버지가 즉결처분을 내리듯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지금은 즉결처분이란 재수 없는 사람이 비둘기의 똥을 맞듯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상에 가득한 죄인들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청문회에 나오면 곧 바로 죄인이 됩니다. 털고 또 털고 파고 또 파기 때문이 아닙니다. 청문회를 피한 사람들이 의인노릇을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억울한 일로 견딜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나 제나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밤낮없이 재판관의 대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달라고, 그리고 바른 판단을 내려줄 때까지 탄원하겠다고 말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소원은 고약한 재판관까지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점을 파고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간절함과 절실함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4가지 결심을 한 것을 저의 스크랩북에서 찾아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절심함으로 살자였습니다. 오늘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이런 간절함과 절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고할 수 있느냐 입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마쳤을 때, 나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생각했지만, 장학생이 되고 말고는 교수님들의 평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교수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들어와요! 라는 소리에 문을 열고 보니 교수님들이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라고 하자, 들어왔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시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들의 선처를 구합니다. 라는 두 마디 말을 하고 도망치듯 문을 닫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의 형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저를 도와줄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실을 찾았고, 제 얼굴에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득 배어있었다고 훗날 지도 교수님이 귀띔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과부는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 줄 사람은 재판관 밖에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모델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듣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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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2(2025. 7. 2. 수요일).

시편 120:4-7.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어느 정도는.” “그 행복 리스트를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그동안 느꼈던 생각들을 리스트화 해 보았습니다.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실 때, 거실 창밖이 환히 보이도록 블라인드를 당길 때, 채전에서 자라는 부추나 고추 등 작물들이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랐다 생각이 들 때, 잔디를 깎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려 그대로 남겨둘 때, 음식물 쓰레기를 마을 공동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릴 때, 힘들여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오늘의 묵상자료를 맨 처음 읽어주는 이름들이 여전할 때 등 등.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들이었습니다.

 

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0-37)”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일컫는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마침 <당당 뉴스>에 실린 최재석 칼럼에 예수님은 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을까?” 라는 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 에스겔서에서 처음 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에스겔서에 무려 90번 이상 나옵니다(2:1). 이때의 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그 후 400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인자 칭호는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메시아를 인자 같은 이”(7: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니엘서의 인자 칭호를 채용합니다. 공관복음서에 69, 요한복음서에 13회 나옵니다. 이렇듯 4복음서에 등장하는 인자칭호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호칭하며 사용하였습니다. 4복음서 외에는 4번 등장하는 이 인자호칭은 스데반의 환상(7:56), 시편 8:4를 인용한 히 2:6, 7:1을 암시하는 계 1:1314:14으로, 이 모두에서 언급된 인자호칭은 분명히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란 칭호를 피하고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윌리엄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8:29-30, 1:44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로마의 세력을 물리칠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정작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시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 초역사적 구원자로써 메시아를 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브레데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가운데 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성경을 해석해서 전달해야 하는 일선 목사들은,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술하려고 힘씁니다. 마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시계가 그의 주인 격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만든 주인에 목적(?)에 충실한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킬 말만 늘어놓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날을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 거리는 것과 같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일어났던 사회 현상을 소환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사고 고치는 일에 혼을 쏙 빼놓고 살던 그 때에, 홍수가 온 세상을 덮어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듯, 그리고 롯이 소돔에서 경험했던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든 사람이 멸망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경고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지붕에 올라간 사람이나, 밭에 있던 사람들이 재물을 건지겠다고 집안으로 가지 말라시며, 침상에 누워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두며, 맷돌질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 날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날에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입니다. 일찍부터 준비했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3. 엊그제는 복숭아를 20여개 수확하였는데 맛은 들었는데 크기도 꼴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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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1(2025. 7. 1. 화요일).

시편 120:1-3.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하고, 작게는 독특한 습관이나 성격이 생기게도 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긴 못된 성격이 있는데, 생각없이 말을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진담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이며, 상대방의 호의를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겨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존중은 고사하고 함부로 대한다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싫어지고,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될 때는 날씨 얘기만 하는 사람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속내를 주고받을 좋은 친구란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가 많다 자랑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입니다.

 

2. “나병환자 열 사람(11-19)”을 읽었습니다. 제겐 나병환자 하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 밤, 저의 앞집 엄씨네 집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이튿날 그 집 작은 아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아들을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가족들이 마지막 밤을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 거창 외곽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린다고 교감 선생님이 학생 몇을 데리고 가셨는데, 따라 가서 보니까 나환자 촌이었습니다. 코가 없는 분들과 손목이 없는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많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 중심의 세상이 아니라, 상대 중심의 세상을 바라볼 눈을 뜨게 되었고, 목사의 삶이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목회 초기부터 시각 장애우를 위한 봉사단체를 만들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은퇴 후에는 장애인 교회에서 자비량 설교 목사로 10년째 일하고 있지만, 마음처럼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형/天刑처럼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난 길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던 주님은 한 나환자 촌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외치는 나환자 열 명을 만나셨는데,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명하시자 그들이 떠나갔는데,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은 주님께 되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나환자는 이방인이었다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는 난치병으로 알려진 나환자를 주님께서 고치셨다는 치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 열 명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은총에 감사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일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다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 평생을 그 은혜 갚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제게도 참 고마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가족과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납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으로 대학 4년을 졸업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하루 이틀 여관신세를 지고 밥을 사먹다 보니까 일주일이면 그 돈을 다 쓸 것 같았습니다. 그 절박한 시점에 저를 도와준 분이 신촌 로터리에서 노고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던 신촌감리교회의 허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위해서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신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의 사감께 머리를 숙이고서 힘든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가졌던 돈으로 2달치 식비를 낼 수가 있었고, 그 뒤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공부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열심히 섬겨 은혜를 갚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학기만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을 뿐, 루터교회를 알게 되면서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그 목사님과 교회를 잊고 살았습니다. 무정하고 비정하게 말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 분의 아드님이 중앙대 교목실장으로 계셨을 때, 옥수동교회에 설교자로 한 번 모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많이 도와 주셨는데, 한 두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였으니,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도 받은 은혜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갚으라.”고 말입니다.

 

3. 여름 한 복판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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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10(2025. 6. 30. 월요일).

시편 119:174-176.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세상을 구경만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란 남의 것을 구경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구경하고 구경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함께 부딪히며 밀치며 뒤얽혀서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는 의식도 없이 우리는 어쨌든 슬프거나 즐겁거나 쉴 새 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서 누구는 선한 배역을 맡고, 누구는 악역을 하면서 남의 미움을 받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진정 동정하거나 우러러봐야 할 인간은 누구여야 할까?”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36.

 

2. “죄의 유혹과 용서(1-4)”, “믿음의 힘(5-6)” 그리고 종의 의무(7-1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매우 드문 얘기이지만, 본문에는 큰 믿음에 대한 실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보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한 가나안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많은 장벽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갔는데, 큰 믿음을 가졌다는 칭찬을 들을 뿐 아니라, 딸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15:21-28). 믿음이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우 의례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진 것일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은총은 무한해서 셈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만이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믿음을 두고 도박하는 심정에 비유했습니다. 저 유명한 <파스칼의 도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을 신비한 것이라 풀이했습니다. 믿음은 이성의 영역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신앙의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라고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믿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말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미친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명합니다(2:8).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만이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 뜻대로 될 것이라 잘못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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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9.

시편 119:171-173.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잡한 완행열차 안에서 자리 양보를 받은 권정생은 양보한 여인에게 혹시 교회 다니느냐 물었고, 반색하는 그 여인은 시골교회 집사라고 했다. 어느 날 바쁘게 농사일에 정신이 없는데, 거지 한 사람이 구걸하러 와서 퉁명스럽게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꼭 예수님을 닮아서 쌀 한 바가지를 퍼들고 나가보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대성 통곡을 했다 한다. 그 뒤로는 거지는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p.116-117.

 

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갈 5:1, 13-15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자유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력이며(Freedom), 동시에 억압하는 제한이 없는 상태를(Liberty) 말합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 거룩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자유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1).

상해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친일파의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그들은 열혈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광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세계열강의 공로로 해방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으려는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열강에 의해서 자주권을 상실한 민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넓은 틀에서 생각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하겠습니다. 죄의 속박에 붙잡혀 있는 동안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주차 실수로 다른 자동차에 흠집을 냈습니다. 목격자도 CCTV도 없었습니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피해 자동차에 저의 전화번호를 남겼고 수리비를 지불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둠에서 광명을 찾는 자유를 실감하였습니다.

 

주어진 자유를 육정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명하십니다(13).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거룩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 Autobahn)는 약 70%18,000km가 무제한 속도이지만, 권장속도는 130km입니다. 저를 초청한 바바리안 주의 작은 마을 노이엔데텔샤우의 베커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 아우토반에서 잃었다 술회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지킬 매우 간단한 약속을 어긴 불법 차량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제한적인 자유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경계해야 하고 명심 또 명심할 것은 육정/肉情이라 했습니다. 존경까지 받던 권력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육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세의 힘을 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종노릇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처음에만 반짝 시늉을 낼 뿐, 곧 바로 권력자의 본색을 들어내곤 하였습니다. 초심을 잃지 말라 귓전에 소리쳐도 소용이 없곤 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15).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두 가지 지켜야 할 대/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6:4-9),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질문을 해왔습니다. 마치 자신의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지식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10:25-37). 저도 이 말씀을 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저만은 예외인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저 역시 사마리아 사람처럼 손을 내밀어야 할 이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작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도, 손을 잡아주고 곁에 앉아 주어야 할 이웃들도 너무 많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든든한 부모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손을 뻗을 이웃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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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08(2025. 6. 28. 토요일).

시편 119:168-170.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제일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래서 주야장천(晝夜長川) 기도에 열심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들이 드리는 성공과 출세 중심의 기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불리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며, 그 분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 하셨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도 했고,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도 용서하고, 시험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 기도하라 명하셨다. 다시 생각해 보자.

 

2. “부자와 나자로(19-31)”을 읽었습니다. 삶의 자리, 혹은 삶의 배경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가늠하기에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환경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픽션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적합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부자와 거지 나자로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 있는 그래서 흥미를 백배 끄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호화생활을 즐기는 한 부자가 등장하는데, 매일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이런 부자는 대체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부를 대물림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수성가한 부자는 마음이나 생활을 여유롭게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세기의 환경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처럼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부잣집 대문간에서 거지노릇을 하는 나자로가 등장하는데, 온 몸에 부스럼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부잣집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 쓰레기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고, 개들이 와서 부스럼 병으로 헐어버린 상처를 핥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오래지 않아 죽게 되었고, 거지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부자는 지옥/게헨나에서 멀리 떨어져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자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너무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나자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몇 방울 찍어 자신의 혀끝을 적셔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그게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아직 세상에서 자신처럼 허세나 부리며 어리석게 살고 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나자로를 보내어, 제발 이곳으로 오지 못하도록 경고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라고 단칼에 거절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선 주인공들이 부자는 익명/匿名으로, 거지는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이름이 천년만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의 이름은 세상에서는 무명의 존재처럼 여겨졌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히 기억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부자와 거지에게 내려진 상벌의 문제입니다. 부자가 남다르게 크게 악행을 한 것 같지 않았는데 결론은 지옥행이었고, 그 반대로 거지는 별로 대단한 삶을 산 것 같지 않았는데 천국행이었다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왤까요? 부자와 거지의 인생관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매일이 천국 같은 삶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해서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늙어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기를 쓰고 오래 살고 건강해지는 것이라면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다가 몸보신 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다 쏟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거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상한 음식과 한 모금의 물로 주린 배와 마른 혀를 축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거지 나자로는 이 세상에서 단 하루도 희망이 없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 순간 하늘을 향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천국을 그리면서 천국에서 살아갈 꿈을 꾸게 되었고, 천국에서 사는 사람다운 품성을 갖추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의 인생관은 이 세상에서의 환락에, 거지의 인생관은 하늘나라 천국에서의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갈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의 삶의 방향은 정반대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자세입니까? 아니면 거지처럼 천국만이 희망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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