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79(2024. 4. 25. 목요일).

시편 시 60:5-8.

찬송 49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든을 목전에 두고서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요즘은 소설보다는 산문과 시에 더 눈길이 간다. 소설보다는 너무도 사람 냄새가 나는 때문이다.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거나, 공지영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은 후에는, 앞으로는 산문을 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다시 꺼내 읽었다.

    “<중략> 7시 반쯤 목욕탕에 갔더니, 모녀 세 사람의 여자 거지가 와 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살갗이 검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칼은 엉클어지고 까실까실 했습니다. <중략> 그 때 한 아주머니가 탕에서 나와 야아, 이것 봐, 구질구질하게 시리, 밖에 나가 입어!’ 하고 밀어내듯 닦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중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언니가 아니에요. 이는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가 옮을까봐 나가라고 하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중략> 나는 내가 가난한 때문인지, 이런 사람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옵니다. <중략>. (1955. 4.23).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누나인가 하고 뛰어나가 보았다. 낯선 남매거지가 깡통을 들고 받을 얻으러 왔어요. ‘밥 좀 주이소.’ 하는 소리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중략>. 두 남매는 눈이 둥그런 채 나를 한번 보고, 밥그릇을 한번보고 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던 모양이지요. ‘퍼뜩 먹어라. 배 안고프나.’ 하니 두 남매는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어요. 나와 순나는 우두커니 서서 밥 먹는 남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불쌍한, 이것들이 옛날의 우리였습니다. 정말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만 술을 잡숫지 않고 부지런히 상/일을 하신다면, 이놈들 둘쯤은 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남매를 보내며 나는 다음에 또 오라고 당부했습니다. 대문간에 한참 동안 서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는 두 남매를 지켜보았습니다. (1965. 10),

    이 두 개의 일기 중 앞의 것은 일본에서 사는 동포 소녀 스에꼬의 것이고, 뒤의 것은 윤복이의 일기다. 두 어린이는 한 10년 사이를 두고 태어나 똑같이 열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pp.110-112.

 

2. “모세가 새 증거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오르다(1-4)”야훼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다(5-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언약의 말씀을 새긴 증거판을 받으러 시내산을 오른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동요하였고, 마침내 모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대신해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도 없는 허술한 믿음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두 개의 증거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는 해괴하게 벌어진 아론과 백성들의 행동과 믿음에 화가 나서 두 증거판을 금송아지에게 내리쳐 금송아지와 함께 증거판도 깨트려지고 말았습니다(31:18-32:24). 그래서 다시 새 증거판을 받기 위하여 두 개의 석판을 준비해서 시내산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증거판도 그리고 깨트려진 증거판을 대신할 두 번째 증거판도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일이고 실행토록 추진하신 것입니다. 오랜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는 돌 판에 새긴 언약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31:31-34).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모른다 핑계치 못하도록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약속이란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서로 합의가 될 때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약속이나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은 쌍방적인가 아니면 일방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형식적으로는 하나님 주도형 언약임에 분명합니다.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말씀하고 있는데, 십계명을 구성하는 열 가지 내용에 대해서 모세의 의견이 얼마나 보태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구의 형식으로 보아,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것임은 분명합니다. 모든 계약관계는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둘 중 누군가에 의해서 주도되기는 마련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모세는 언약을 기록할 돌 판을 준비한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입니다. 돌 판에 기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용을 알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준비한 돌 판에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계약서를 받아들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신과 민족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8(2024. 4. 24. 수요일).

시편 시 60:1-4.

찬송 4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전에 동묘 빈티지 가게를 찾아 여름 셔츠 한두 벌을 사러갔는데, <청계서점>에 들려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어 시간을 책방에서 보냈는데, 귀한 책 6권을 건졌습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중의 두툼한 책 한권이 오늘부터 소개드릴 우리 조선의 문장들의 산문입니다. 청주 사람 노긍/盧兢은 자는 여림/如臨 호는 금석/今石을 썼는데, 과거 시험장에서 과문/科文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평안북도 위원군에 귀양 가서 6년을 고생하였습니다. 노긍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과문의 명수이었는데, 그 죄목은 억울하게 덮어쓴 것이었다 합니다. 특히 제문과 묘지명을 많이 남겼습니다.

    다음은 죽은 그의 노비 막돌이의 제문/祭文입니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주인은 글을 지어 죽은 노비 막돌이의 무덤에 고하노라. 안타깝구나! 너는 성이 채 씨(蔡氏), 내 아비는 관동 땅의 양민이었고, 네 어미는 내 외가의 여종이었다. 네 아비가 내 말을 끈 지 스무 해 만에 길거리에서 죽어 내가 남원의 만복사에 장사를 치렀다. 네 어미는 내 몸을 받들어 기른 지 서른 해 만에 내 집에서 죽어 내가 공수곡 서산 밑에 장사를 치렀다. 네 형은 나를 위해 근면하게 수십 년 동안 봉사하다가 또 집에서 죽었고 나는 또 그의 장사를 치렀다. 이제 네가 또 아들도 없이 죽었으니, 너희 채 씨는 드디어 종자가 없어졌구나! 네가 태어난 지 세 돌 만에 네 아비가 죽었고, 여섯 돌 만에 네 어미가 죽었다. 네 안주인이 너를 거두어 길렀는데 굶주리고 잘 입지 못한데다가 병치레를 자주하여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했다. 네 안주인이 돌아갔을 때 너는 아직 5척 동자였는데, 고괴/古怪한 꼴에다 더벅머리를 하고 깡마른 잔나비처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략> 네가 이제 지하로 들어가면 네 아비 네 어미와 네 형, 그리고 네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네가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내 사는 형편을 물을 것이 틀림없다. 근년 이래로 사지가 불편하고 이가 빠지고 머리가 듬성듬성하여 영락없는 늙은이 꼴이라고 너는 고하겠지. 그러면 서로들 얼굴을 보고 탄식하고 낯빛을 바꾸며 나를 불쌍히 여기리라. 아 아!” 안 대회, [고전 산문산책], pp.146-147.

***과문/科文 : 과거시험은 특정한 형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과거를 보려는 유생들은 과문법 양식을 배워야 했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발을 명하시다(1-11)”모세의 기도(12-2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을 명하십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앞에 둔 모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깨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여기를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받아주셨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12-17). 둘째는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다 말씀하십니다. 까닭은 당신의 얼굴을 보고 나서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뒷모습만큼은 볼 수 있으리라 대답하십니다.

    모세의 기도는 오늘 우리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신다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무작정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게 해달라는 합당한 기도는 들어주셨지만,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거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을 구했지만, 하나님의 뒷모습은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이해를 유보해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고전 13:12의 말씀처럼 지금은 희미하나, <중략>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온전히 알게 되는 그날을 위해서 남겨두신다는 의미입니다. 까닭은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기까지는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라 기도할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7(2024. 4. 23. 화요일).

시편 시 59:14-17.

찬송 3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신교회에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는 로마 가톨릭의 위인 가운데는, 서기 480년경에 로마 명문 아나치우스 가문에서 출생한 A. M. Sev. Boethius(보에시우스)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 대대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보에시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사형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처형 날을 기다리며 저술한 자신의 시와 산문을 채집한 책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 신앙이 느슨하다 못해 신앙생활과 세속적 삶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그의 생생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진 것입니다.

    [철학의 위안]은 제가 부산 제일 루터교회에서 목회할 때(1980.11.26.) 구입한 책으로, 가장 낡은 종이로 부스러질 것은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구름으로 별빛이 가리우고, 맑은 물이 흙탕으로 흐려지며, 시내가 바위에 부딪히면 인간의 숭고한 인식이나 정신도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니, 이런 것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먹장구름으로 가리운 별은, 제 빛을 낼 길이 없다. 거센 남풍이 바다 위를 휘몰아칠 제, 파도는 사나워지고. 개인 날씨에 수정마냥 맑던 물도, 흙탕이 지면 보기 흉하구나. 높은 산허리를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도, 때마다 바위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진다. 너도 저 모양 맑은 눈으로, 진리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즐거이 좁은 길을 택하고 두려움도 희망도 지니지 말며, 고통도 또한 쫓아버리라. 저것들이 지배하는 곳에는, 정신이 흐려지고 번뇌의 쇠사슬로 얽매인다.”

    [철학의 위안]을 번역한 정의채 교수는, 서울 가톨릭 대학과 로마 올바노 대학,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박사, 그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독일 뮌헨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가톨릭 대학 교수, 서강대학교 교수로 지냈던 분으로,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저 <신학대전>을 번역하셨습니다. 9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특이한 사항은 자신의 생일날에(1925.12.27.) 별세한(2023.12.27.) 분이시라 하겠습니다.

보에시우스(정의채역), [철학의 위안], 성바오르 출판사, pp.55-56.

 

2. “모세와 레위인들이 우상숭배를 숙청하다(21-29)”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빌다(30-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북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40년 광야생활은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이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생활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적절한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 삼아 국방의 의무를 회피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는 국군 통수권을 가진 자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훈련이란 여러 가지 종류가 많습니다. 건강한 남자들은 19-35세에 입대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징집제로 무조건 신체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으면 입대 영장을 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를 비롯 지방 군부대에서 6주간의 훈련을 받게 되는데, 얼마나 엄격한지 모릅니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저녁 10시 취침 시까지 11초도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탈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곤 합니다. 훈련을 잘 마친 군인은 앞으로 남은 기간(14.5개월)을 부대 배치를 받아, 자신의 주특기(Mos.)에 따라서 근무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힘든 기간이 처음 6주 훈련소 기간입니다. 군인으로써 기초 훈련을 다 받게 되는데, 개인화기를 취급하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킵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 25연대 출신인데, 그 후에 기갑학교(탱크)에서 14주간을 훈련받았는데, 그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차 교육대대에서 작전과 작전 병으로 도합 311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김신조씨가 청와대를 겨냥하고 남파되는 시기여서 갑작스럽게 28개월에서 36개월로 바뀐 것입니다.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제 얘기도 길게 곁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헌신된 인간이거나 완성된 인간들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령 저의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입학사정관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때의 제 나름의 기준은, 그 학생이 그동안 닦아온 인성이나 품성 그리고 학문적 능력이라면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우리 학교에서 시행하는 공부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보고 선발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 40년이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이 맡은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아무리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잘 받지 못하거나 자포자기 하는 그런 무능한 사람이라면 벌을 받기도 하고 탈락시키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시련과 역경 앞에서 하나님 보다는 눈앞에 있는 가까운 우상을 택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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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6(2024. 4. 22. 월요일).

시편 시 59:12-13.

찬송 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주위에 요즘 글씨 학원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손 글씨를 아주 예쁘게 잘 써서 칠판글씨 같은 것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잡지사에 다니면서 취재 때마다 급히 받아 적다 보니 글씨가 엉망이 됐답니다. 그런데 컴퓨터자판 시대에 무슨 대수랴 했는데, 갑자기 학창시절처럼 예쁜 글씨의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절실했다고요. 또 영화포스터 같은 곳에 제목 글씨를 쓰는 켈리그래피 일에도 관심이 갔답니다. 그래서 결국 글씨학원에까지 등록을 했지요. 얼마 전에는 마침내 옛날의 손 글씨를 되찾았다며 증거의 엽서까지 보내 주었어요. 이런 글씨를 가진 사람은 평소 마음도 일상도 이렇게 산뜻하고 깔끔하지 않을까 싶었던 바로 그런 글씨체로요. 실제로 심리분석가들은 글씨도 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하지요. 간단한 예로, 글씨체가 동글동글한 사람은 성격도 원만하지만, 다소 권위의식이 있고, 네모반듯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조용하면서 무뚝뚝한 성격인데, 글씨가 작으면 소심하고 다소 신경질적일 수도 있지요. 또 영어필기체를 쓰듯이 날려쓰는 사람은 글씨 그대로,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격의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 연관성 때문에 범죄수사 같은 데선, 필적감정으로 용의자의 심리상태나 당시 상황을 추측해 내기도 하는데요. 이젠 컴퓨터의 키보드 시대라 손 글씨 쓸 일이 훨씬 줄어들긴 했지요. 그래도 친구 엽서를 보니까 덩달아 기분도 깔끔해지고 산뜻해 지는 게, 수능 논술 고사같이 손 글씨가 들어가는 시험에선, 시험관의 채점 심리에도 아주 작게나마 영향을 좀 미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26일 방송>

 

2. “새 생활의 인간관계(3:18-4:6)”을 읽었습니다. 크리스천의 인간관계라고 표제어를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크리스천 이전의 인간관계란 정 반대로 이해하면 되겠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처음 부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목표를 어린이와 노인에게 전도 대상을 삼고, 어린이는 어린이 집을 세워서 그 가정과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을 설득하는 작업이 생각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황혼기를 보내는 노인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노인 회관에 틀어박혀서 하릴없이 따분하게 지내는 환경에서 좀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하자고 노인회 임원들을 설득하였는데 회장님은 일본 유학을 하신 분으로 제 의견에 거의 동감하시고, 저를 기특하다고 칭찬까지 하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실패한 전도였습니다. 그러나 사탕이나 우유를 사들고 들어갔던 것은 결코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6년도였으니까 유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는데, 노인 회장은 제게 신문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꾸로 읽으면 딱 맞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용시키면 재미있겠다 싶습니다. 첫째는 1세기의 유대 사회는 여자가 드세서인지는 몰라도 남편을 우습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크리스천의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남의 수하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주인에게 불복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넷째로 주인들은 자기 종들을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였습니다. 다섯째로 기도에 게으르고 불평하는 크리스천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권/女權이 신장해서 자기 부인에게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서구사회는 우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가르침이나 꾸중을 듣기 싫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꼴통이라고 되레 항의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민주사회는 주인과 종이 직능이라는 점에서까지 똑같은 의견을 갖는 줄 알고 자기 직원의 눈치를 보는 중이라고 얘기들 합니다. 기업가들에게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자기 사원들을 함부로 불편부당하게 관리하는 불합리성이 노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대 조류/潮流라는 핑계를 대면서 기도에 게으르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 낭패입니다. 이런 얘기는 미국 현역 목회자가 핏대를 올려가며 제게 성토한 얘기들과 같았습니다. 한편에서는 목회자들이 배가 부르고 여흥거리가 늘어나면서 목회에 대한 진정성도, 설교에서의 감동도, 실천하지도 않는 자기변명이나 빈말만 늘어놓는 삯군의 목자로 변신한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소생해야 교회도 소생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자신의 목회자를 위해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30%에 가까운 국회의원에, 50%에 육박하는 의사에, 전체 국민의 30%가 크리스천인 우리나라가 어떻게 절망을 성급히 논한단 말입니까?

 

3. 내일부터는 KBS FM1 의 이야기가 책 소개로 바뀌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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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5.

시편 시 59:10-11.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들이 곡을 쓸 때 자주하는 고민 중 하나가, 클라이맥스를 어디에 둘지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곡의 성격이나 작곡의 개성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방법 중 하나는, 황금 분할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지요. 건축에서도 미술에서도 통용되는 이 법칙이, 음악을 구성할 때도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건데요. 하루라는 시간을 여러 가지 사건 일로 채워가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창작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고 유익한 새로운 일들로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422일 방송>

 

2. 부활절 넷째주일의 복음서 눅 24:36-49을 본문으로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후,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그들 무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부활신앙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여전히 부활신앙을 증명하려는 헛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36-40).

이틀 전 국민일보는 서울신대 교수진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였는데, 이른바 창조론과 유신진화론 중에서 창조론을 지지한다는 발표였습니다. 서울신대 박영식교수가 쓴 책들에서 유신진화론을 옹호한 때문이었습니다. 창조론은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을 변증하는 학문으로 한국 창조과학회를 중심으로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유신진화론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되, 이를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해 온 소모전쟁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부활신앙에 이르는 길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귀와 눈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셨다는 깨달음을 얻자는 것입니다. 부활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눈으로 주님을 만났던 증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애찬을 통해서 친교를 나누신 주님에 관해 증언을 했습니다(41-43).

또 다른 부활신앙이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만찬에서 주님께서 떡을 떼어주시자 믿음의 눈이 떠진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간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상실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눈 애찬에서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죽었던 믿음이 살아나고 희망도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공동체와 애찬을 나눌 때 그곳에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고,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 믿으려 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먹고 있던 애찬을 나누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친히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잡수신 것입니다. 그들 제자들은 이 식탁 공동체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고, 주님이 생각날 때마다 구운 생선을 메뉴로 가졌던 즐겁고 반가운 식탁공동체를 기억하며 담대하게 부활을 증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주님과의 식탁 교제를 통해서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44-49).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의 증언들을 받아들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설교를 풀어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성만찬을 우리들 몸으로 주님의 약속을 체험하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말씀, 귀로 듣는 말씀 그리고 오감으로 체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세교회를 그린 역사나 그런 신앙소설들은, 성만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구구절절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성만찬을 나눌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선교여행을 다닌 생생한 기록들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창조신앙이나 부활신앙은 과학적인 도구에 약간의 도움만 받을 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시기 전에는 전혀 무력한 것임을 깨닫고, 성만찬을 통해 강력한 신앙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3. 묵상식구 엥글러목사님(미국 위스컨신루터교회)께서 한국 방문중, 양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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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4(2024. 4. 20. 토요일).

시편 시 59:7-9.

찬송 1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 아침 하늘, 오늘은 좀 어두컴컴해서 일어나기 힘드셨지요? 어제 나름대로 작은 폭풍이 한번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케이비에스에 오는 길에 보니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우산들도 보이고, 또 하루 사이에 다시 스웨터까지 꺼내 입으신 분들도 간간히 보이던데요. 그래도 아침 공기 비 덕분에 아주 맑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맑은 공기 한번 흐리지만 가득 맡으시면서, 좋은 음악 들려드리겠습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시절 눈으로만 별을 관찰했습니다. 육안으로 관측했다고는 믿기 정확해서, 그의 제자는 브라헤가 완성해 놓은 기록을 읽어내는 데만, 무려 4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면 귀가 열리는 것처럼, 관심 있는 것을 바라볼 때는 눈도 점점 밝아지는 걸까요? 수천의 관객 속에 섞여 있어도 엄마 얼굴만은 정확히 보인다는 김연아 선수처럼, 안경을 벗고도 또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보이는 소중한 것들이 더 많이 늘었으면 합니다<KBS FM 1, 가정음악, 2009421일 방송>

 

2.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5-17)”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서 절망을 느낄 때도 그렇지만, 적어도 사는가 싶은 삶을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때입니다. 그래서 몇 날을 고뇌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일을 훌훌 털어버리자는 솔깃한 소리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대는 크리스천으로써 어떤 삶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사도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진실한 말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써 다음과 같은 삶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첫째는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는 일입니다(5). 만일 우리가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 우상숭배처럼 하는 탐욕을 갖지 않는 일인데, 이를 거역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거짓말로 서로 속이는 일입니다(9). 우리는 선거 유세를 주목하면서 우리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과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는 정치 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절망하면서도, 그래도 낡은 인간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희망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300명의 의원 중 87명이(29%) 개신교인이라고 밝혔다 했습니다. 그분들이 새로운 지도자의 불씨가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따뜻한 동정심과 마음을 새롭게 해서 서로 돕고 불평할 일이 있어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12). 우리들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는 일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기만 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네 번째는 사랑을 실천하자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지나온 우리의 경험으로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만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다섯째로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 하십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는 반문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을 찾아보면 놀랍게도 감사할 것은 많고 많습니다. 여섯째는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 하십니다. 애초에 온전한 사람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죄를 물려받고 죄와 어울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다면 진심을 다한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주고, 사랑과 감사 용서의 마음을 솟아나게 합니다. 20181225일 저녁 9시 미국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카운티에서는, 소총으로 무장한 남편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할 목적으로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갔는데, 밤새도록 대치하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경찰의 노래에 자수했던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힘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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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3(2024. 4. 19. 금요일).

시편 시 59:6-8.

찬송 4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국적으로 내리는 이번 비가 그치게 되면, 농부들의 일손이 더 바빠지겠지요. 차밭 일꾼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창 찻잎을 따는 철에 차밭 일꾼들은 하얀 장갑이 초록으로 변할 때까지 종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곤 합니다. 곡우 무렵에 수확한 녹차는 맛이나 향 모두가 무척 뛰어나다고 해서, 이 무렵의 차밭은 가장 바쁘다고 하지요. 이번 비로 차나무가 무성한 언덕은 더 짙은 초록이 되어 있을 겁니다. 차나무가 일꾼들은 그 진녹색의 차 밭 사이로 분주히 바쁜 발길을 재촉하겠지요.

    “말랐던 풀뿌리의 속잎은/ 따스한 연록의 융단으로 깔린다/ 그 위에 몸 부비며 딩구는 꽃바람/ 포송포송 살찐 집오리들이 아련한 비장의 꿈을 꾸며 보드란 연록빛 융단을 밟고 구불구불 이동한다/ 키보다도 긴 막대기를 몰고 가는 불그레한 살구꽃/ 살구 꽃 뺨에 저 타이완 소년은 몇 살쯤 될까/ 익는 아지랑이에 녹은 길 부어내리는 해살이/ 금가루를 축복인양 듬뿍 듬뿍 듬뿍 받으며/ 봄맞이 나가는 오리 떼 행렬은/ 어느 섬에 연한 선을 그리듯 조용한 숨에 맥락이 된다.”

    또 하나의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듯 한 곡입니다. 작곡가 임 무상은 대구를 대표하는 원로 작곡가입니다. 평생을 오선지에 묻혀 고집스럽게 작품만을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작곡가는 음악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서예가 곁에 서면 묵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듯, 작곡가의 주변 역시 음악의 향기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자녀들 역시 음악을 좋아했고, 여전히 모두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딸 임 여옥은 작곡가로 성장을 했고, 아들과 며느리 손녀까지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장 즐거운 순간은 제자들과 함께 일 때라고 작곡가는 지난 시간을 추억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좋은 스승이자 음악 선배로써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문 덕수 시 임 무상 곡 <봄의 서곡>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20일 방송>

 

2. “세속의 유치한 원리에 대한 경계(8-19)”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활(20-2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골로새가 위치한 소 아시아지방은 유럽과 접경지대를 이루는 곳으로 헬라 철학 사상이 오래 전부터 유입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은 신앙을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당신의 대부분의 신앙이란 미신에 가까워서 유식한 통치자들에게 있어서는 쉽게 다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울을 비롯한 1세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철학의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일이 최대의 난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철학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정공법(正攻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조선조의 정하상이 재상에게 올린 상소문(정하상의 상제상서)이라 하겠습니다. 1801년 황서영의 백서사건으로 부친과 맏형이 순교하자 당시 7살이던 정하상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에서<상재상서>를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천지 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지(良知) 즉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는 천주 십계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 윤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십계안에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에 관한 모든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실천 윤리에 비해 천주교의 그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그는 밝혀보려 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교회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며,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의 정치적 싸움(노론과 남인)에 많은 희생자들 발생했다는 점과, 양반과 지식인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 기독교 정체성에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설교를 보면, 거의 모든 설교들이 공 맹자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진리를 해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고등종교가 윤리와 도덕을 기반으로 할 뿐, 자칫 기독교 신앙을 윤리적인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강조되는 것은, 20, 21세기 현대인에게 성공과 출세가 신앙생활을 목표처럼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가장 강조하는 할례의식을 진정한 할례란 세례임을 강조하는 점이나, 죽은 자의 첫 부활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점, 그리고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가 무력하게 되었다는 점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재교육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환경에 적절히 도전과 응전을 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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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2(2024. 4. 18. 목요일).

시편 시 59:4-5.

찬송 37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리처드 바크라는 작가는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지요. 심리학자 최정길씨의 책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의하면, 가장 잘 달리는 영양은 가장 높이 뛴다고 합니다. 일명 값비싼 <신호보내기의 원리> 때문이지요. 동물의 왕국 같은 데를 보면 은요. 영양은 단체로 무리지어 가다가 사자나 강한 적이 나타나면, 부리나케 흩어져서 도망갑니다. 하지만 몇몇은 도망가는 대신, 높이뛰기를 하듯이 위로 껑충껑충 뛰고만 있습니다. 여차하면 잡아먹힐 다급한 상황에서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말이 예요.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장난이 아닌, 목숨 걸고 하는 절박한 신호랍니다. 사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지요. “봐라 사자, 나 이렇게 높이 뛸 줄 아니까, 달리기도 엄청나게 잘 한다. 그러니까 나는 잡지 않는 게 좋을걸!” 이렇게 알려주는 신호요. 그런데도 사자가 그 신호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 영양이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잘 달리지 못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겠지요. 정말 목숨을 걸고 보내는 값비싼 신호입니다. 물론 애초에 달리기 능력에 자신이 없는 영양은, 그런 값비싸고 위험한 신호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채, 무조건 도망부터 가겠지요. 우리에게도 인생의 어떤 새로운 단계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옵니다. 직장을 옮기는 일이든 아예 새로운 일이 됐든, 인생 전체를 걸라나는 듯이 몰아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훨씬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더 돋보이는 값비싼 신호 쪽을 택할 것인지, 그저 평범한 그래서 더 안전한 비싸지 않은 신호 쪽을 선택할 것인지, 그건 역시 달리기 실력에 달려 있겠지요. 평소 얼마나 잘 열심히 달렸느냐? 노력과 실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높게 뛰어오르는 자신감 발휘에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건 평소 실력인 거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54일 방송>

 

2. “교회의 일꾼 바울(1:24-2:7)”을 읽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친교를 나누었다고 그래서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면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 너무 간격이 크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평생 함께 동고동락한 부부 사이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고사성어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생겼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처럼 불가피하게 생전에 본 일도 없는 골로새 교우들에게 바울사도는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말입니다. 1세기 소아시아나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예수 운동은 많은 교회 일꾼이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전혀 다른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신앙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이단들입니다. 재산을 바치게 하고 생업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사기집단들 말입니다.

    교회의 일꾼에 대한 사도의 자기소개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러 가지 점에서 울림을 줍니다. 교회의 일꾼이란 첫째로 교회(성도)를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흔히 교회 일꾼을 사명자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의 학식이나 능력으로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는 아니어도 크게 고생 없이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들어선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할 때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친구나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있고, 봉사하는 사람도 있으며, 예배를 섬기는 성가대원이나 예복을 준비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밖에도 친교를 위해서 섬기는 사람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교회로 모시고 오는 차량 봉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런 모든 교회의 일꾼들이 성숙한 인 간, 성숙한 신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교회 일꾼들의 수고는 서로 서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완성하는 것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갈 때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고 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질수록 많은 문제가 생기는데, 그 제일 원인은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재한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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