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95호.
시편 119:129-131.
찬송 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괴테의 <충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괴테는 행복이 저 구름 너머에 또는 저 높은 산 너머에 있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삶에 셀 수 없이 많이 널려 있는데 잡지 못할 뿐이라고.
2. 성 삼위일체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8:48-59을 본문으로 “성경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에 관한 말씀들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예수께서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라는 신학의 풀이는 믿음으로 접근하라고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1세기 유대 갈릴리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48-51절).
갈릴리 주변을 수 천 수만의 사람들로 들끓게 만들었던 젊은 예수는 온 나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마 13장) 직업적인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의 신앙을 흔들었고, 산상수훈의 말씀들은(마 5-7장)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청량제와 같았으며, 기존의 율법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즉결 처단하려고 했을 때(요 8:1-11) 하신 말씀이나,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석(눅 10:25-37)은 사람들의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젖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에서는 천국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출현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당시의 유대 사회는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52-59절).
어느 시대나 영웅 숭배나 초인사상이 있어왔습니다. 그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든 불의를 물리치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행적에서 사람들은 이 같은 초인사상을 품다가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 중심의 세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가르침과 행동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미쳤거나 마귀 들린 사람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앙의 영웅 아브라함과 비교하게 되었고, 예수는 주저 없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보려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교파들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교파에서는 사도신경이나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협의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광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만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들과,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먹어도 된다는 이들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해들을 잘 정리해 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학이 없는 교파에서는 많은 이단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일하고 계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삼위요 일체인 신학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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