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95.

시편 119:129-131.

찬송 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괴테의 <충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괴테는 행복이 저 구름 너머에 또는 저 높은 산 너머에 있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삶에 셀 수 없이 많이 널려 있는데 잡지 못할 뿐이라고.

 

2. 성 삼위일체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8:48-59을 본문으로 성경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에 관한 말씀들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예수께서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라는 신학의 풀이는 믿음으로 접근하라고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1세기 유대 갈릴리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48-51).

갈릴리 주변을 수 천 수만의 사람들로 들끓게 만들었던 젊은 예수는 온 나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13) 직업적인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의 신앙을 흔들었고, 산상수훈의 말씀들은(5-7)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청량제와 같았으며, 기존의 율법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즉결 처단하려고 했을 때(8:1-11) 하신 말씀이나,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석(10:25-37)은 사람들의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젖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에서는 천국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출현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당시의 유대 사회는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52-59).

어느 시대나 영웅 숭배나 초인사상이 있어왔습니다. 그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든 불의를 물리치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행적에서 사람들은 이 같은 초인사상을 품다가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 중심의 세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가르침과 행동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미쳤거나 마귀 들린 사람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앙의 영웅 아브라함과 비교하게 되었고, 예수는 주저 없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보려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교파들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교파에서는 사도신경이나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협의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광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만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들과,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먹어도 된다는 이들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해들을 잘 정리해 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학이 없는 교파에서는 많은 이단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일하고 계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삼위요 일체인 신학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4(2025. 6. 14. 토요일).

시편 119:127-128.

찬송 4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의 마지막 두 연을 옮깁니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2. “야훼께서 시온에게 위로의 말씀을 내리시다(5-14)”을 읽었습니다.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둥을 붙잡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만 자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간 중간에 야훼께서 말씀하신다.”(5, 9, 12)는 구절을 삽입하고 있는데, 까닭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억해야 하고 순종해야 할 삶의 규범이 되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잊었으며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서 잘못된 삶을 살아가곤 하였던 것입니다. 며칠 전 저를 찾아왔던 옛 주일학교 학생들은, 오래 전의 제가 했다는 말들을 기억하며 회상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말의 의미와 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를 신약신학으로 인도해 주셨던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주 한 밤중에 밖에 나와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게.”라고 말입니다.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는 별들처럼 주변 세상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꾸벅꾸벅 그날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자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은, 그분들의 말씀을 떠올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은 다양했습니다. 빈정거리며 따돌리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 다독여 주시고, 도시들에게 아우성치고 성전에서 울부짖는 소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보복하시는 소리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통곡하였지만, 도리어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마음이 흐뭇해지고, 뼈마디가 새로 돋는 풀잎처럼 싱싱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채전에 물주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이 세 포기 중 두 포기는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제법 자랐는데, 그리되고 말았습니다. 부추와 상추를 제외하고는 누렇게 잎이 떠가고 있습니다. 고추는 너무 불쌍한 모습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중입니다. 오늘 내일 하며 비를 기다리는데, 철부지 인간들은 가족 여행을 잡은 날에 비가 올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우리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비를 내려달라 구하는가 하면, 비가 와서는 안 된다고 반대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서둘러서는 안 될 이유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성탄절이 지난 나흘 후, <무고히 순교한 영아들을 기억하는 날>에는 뜻 모를 하나님의 섭리에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그 철모르는 영아들이 주님의 피난을 도와준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뜻 모를 고통도, 뜻 모를 아픔도 없을지 모르겠다 생각합니다. H. W. 롱펠로우는 그의 <화살과 노래>에서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느티나무에 나는 보았다. 아직 꺾이지 않은 채 박혀 있는 화살을.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동무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을 나는 들었다.” 고 말입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라 생각되어도, 먼 훗날 느티나무에 박힌 화살을 보고, 먼 훗날 친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노래를 들을 때가 오리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3(2025. 6. 13. 금요일).

시편 119:124-126.

찬송 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잎은 많지만 뿌리는 하나,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을,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은 흔들었지만, 이제는 시들어 진실 속에 파묻히련다.”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1865-1939)<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입니다.

 

2. “야훼께서 그릇된 예배를 심판하신다(1-4)”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게 예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물론 종교들 마다 저들 나름의 예배가 있고, 그 원리와 원칙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예배가 낯선 것은 그들의 원리와 원칙을 잘 모르는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 기독교회만 해도 교파마다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45년 전에 독일 뉴우런백 교회의 날 행사(일주일간)에 참석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개회 예배를 어느 너른 공원 잔디밭에서 열렸는데, 갑작스럽게 아프리카의 경쾌한 음악이 들리더니 한 무리의 색채 찬란한 탄자니아의 성가대가 찬송과 엉덩이춤을 추면서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무도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신바람 나는 찬양과 엉덩이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마음과 몸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던 저는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입니다. 그때 저는 많이 놀랐으면서도 그들의 예배를 이해하려고 힘썼습니다. 예배는 예배자들의 문화를 최대한 반영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른바 예배의 두 요소, 하나님께서 예배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요소들과(Sacramental elements/ 성경봉독, 설교, 축복선언 등) 함께,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치는 것을 말하는 제사적인 요소(Sacrificial elements/ 기도, 찬양, 감사 등) 중에서, 적어도 제사적인 요소만은 이른바 토착화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거나 설교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진정과 경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찬송 같은 것은 예배자들의 삶의 배경과 무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감사를 여과 없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예배 가운데서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서,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아니라 서양의 문화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분이 판소리 명창 고 박동진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느 핸가 성탄절 특집으로 판소리 한 마디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일행이 예수님을 낳으려 마구간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여봐라 사람들아! 하나님의 아드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누구도 만삭의 마리아를 환영하지 않는구나! 이럴 수가 있느냐? 이래서는 안 되지 않으냐?” 단 몇 마디에 마음이 송두리째 울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예배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종교들처럼 하나님을 삼신 할매나 옥황상제를 모시듯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이지 않게 언제든지 제물에 의해서 마음을 바꾸거나 돌릴 수 있는 그런 바윗덩어리처럼 여기는 일입니다. 엘리야와 기도 대결을 벌였던 바알의 제사장들처럼 광란에 춤을 추는 것이 그런 예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러 고민하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천편일률적인 자기만족에 취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룡산을 오르는 길목에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미륵불이 있는데, 그곳에는 많은 제물들이 차려져 있곤 했습니다. 이런 것은 민간신앙과 결합되어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온갖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하겠으며, 책을 들고 있는 학사 여래 미륵불도 있는데, 그 앞에서 소원을 빌면 대학에 합격한다는 것 또한 민간신앙과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우상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열심히 예배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제는 소위 수능 기도회가 연중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서울 의대와 이화여대 의대에 남매를 합격시킨 부산의 한 권사님은, 자녀들이 공부하는 동안 그들 곁에서 뜨개질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간증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2(2025. 6. 12. 목요일).

시편 119:121-123.

찬송 22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헤르만 헷세는 <들을 건너서>란 시를 남겼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건너서 바람은 간다. 들을 건너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거리 위를 나뭇잎으로 날려가고, 나뭇가지 위해서 새는 지저귄다. 저 산 너머 어딘가에 머언 고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고향을 향해서 바쁘게 걸어가는 길손들이 아닐까?

 

2. “옛 것이 지나가고 새 세계가 온다2(17-25)”을 읽었습니다. 이사야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은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17-19). 그러니까 예루살렘도 새로 세우고, 그 시민들도 새로 나게 하시며, 다시는 울음소리도, 부르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나라로 말입니다. 둘째는 그 나라에서는 제 명을 다하고 죽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20-23). 영아/嬰兒의 죽음이나, 천수를 다하지 못한 노인의 죽음이 없을 것이고, 100세에 죽는 이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하고, 100세 전에 죽는 경우는 벌 받은 경우라 할 것이며, 제 손으로 지은 집에 살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 먹고, 헛수고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천지개벽이 된 세상에서도 죽음이 있다는 말씀과, 그곳에서도 손으로 집을 짓고 손으로 가꾼 식물을 먹는다니 말입니다. 무료해서 지루한 삶이 될 것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에서는 말이 없어도 서로 통하게 되고 늑대와 양이,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고, 어디에서나 분쟁도 다툼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24-25). 어떻습니까? 이를 두고 후천년설을 주장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5, 16년 전에는 제가 사는 마을도 시끌시끌했습니다. 고함소리가 들리고, 욕설도 오고 갔습니다. 그래서 터를 잘못 잡았다 후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쌈꾼 몇이 마을을 떠나가고 평화로운 곳이 되었습니다. 간간히 개들이 짖는 소리와 잔디 깎는 예초기의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들릴 뿐, 예쁜 꼬리를 끄덕 거리며 날아다니는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란 어떤 곳일까를 셈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손만 뻗으면 맛있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아침저녁으로는 긴 호스로 채전에 물을 주어야 하고, 잔디밭에 질기도록 돋아나는 크로버 뿌리를 캐내야 하는 곳입니다. 감나무에 꽃이 피면서 올해도 수백 개의 감 열매를 수확할 수 있구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머니깍지벌레, 감관총채벌레, 갈색날개 매미충, 깍지벌레, 탄저병 등 감 열매를 병들게 하는 벌레들을 방제/防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의 품질은 물론 낙과도 각오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필요한 땀과 수고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적당한 일거리와 노동이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매우 다양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삶과 죽음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감사와 보람을 느낄 만큼의 노동이 있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피 흘리며 싸우거나 다투는 곳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이 잔잔히 흐르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1(2025. 6. 11. 수요일).

시편 119:118-120.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토피아 사상과 하나님의 능력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유토피아 사상은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인간의 죄악성과 교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내게 힘주시는 분을 통해서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4:13) 고백한다.

 

2.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이 온다(1-12)”을 읽었습니다. 한 때 경부고속도로 서울 근교 상행선 우측에 개벽이라고 쓴 큰 입간판이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회사가 광고용으로 설치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궁금했던 것은 그 간판이 상당히 오랜 시간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광고 효과를 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개벽/開闢이란 무슨 말일까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거나, 아니면 세상이 뒤집어진다는 뜻입니다.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켰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외쳤던 구호가 '제폭구민(除暴救民)''보국안민(輔國安民)'였는데, 일반 대중에게는 천지개벽을 알린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 그 개벽이 온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봉준이 꿈속에서 그렸던 개벽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이름을 강아지 부르듯 하고, 하늘의 별보다도 더 따기 힘들다는 장군들의 이름을 개똥이처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고, 사장도 교수도 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개벽된 세상, 옛 것이 아니라 새 세상이 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선민이라며 특권의식을 누렸었는데, 빌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안아 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1-2). 천지개벽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이방신에게 제사하고, 굴 무덤과 으슥한 곳에서 지내며, 부정한 돼지고기를 게걸스럽게 먹고 온갖 거만을 떨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을 벌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3-7). 철옹성 같게만 보였던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아내어 벌주시는 날이 온다 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싱싱한 포도송이와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하고, 샤론 평야와 아골 골짜기를 양떼와 소떼의 휴식처가 되게 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8-10). 오랜 시련과 고통을 말끔히 잊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은 마른 뼈들이 뒹구는 아골 골짜기가 푸른 초원이 되어 양떼와 소떼들의 휴식처가 되는 것으로 반전을 이루도록 하시겠다 하십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행운의 신과 운명의 여신에게 제상/祭床을 차리고 제주/祭酒를 부어 바치는 자들은 모두 칼에 맞아 죽게 하겠다 하십니다(11-12).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다 생각하며, 우상에게 조아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징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만은 아니었습니다. 양날을 가진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긍휼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지만, 끝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기다림과 참으심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그 날은 임박한 종말의 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파에서는 연옥에 있는 선조들을 위해서 후손들이 기도해 줄 수 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국으로 올려주신다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그런 신앙은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신앙이기 때문에 유효할지는 우리로써는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을 순종하고,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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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0(2025. 6. 10. 화요일).

시편 119:115-117.

찬송 33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말이면 틀림없이 부르곤 하는 올드 랜 사인/ Auld Lang Syne은 스코트 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1759-1796)가 개작한 것입니다. 그는 6월의 꽃 <내 사랑은 빨간 장미꽃>에서, “그대 정녕 아름답다, 나의 귀여운 소녀. 이토록 깊이 나 너를 사랑하노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바위가 햇볕에 녹아 스러질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런데 장미는 곧 바로 시들어 버리는 것을 몰랐을까?

 

2. “호소하는 기도(15-64:9)”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런 호소하는 기도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생겼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님께 원인이 있고 책임이 있는 듯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무심한 체 한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15). 하나님의 길을 떠나서 헤매도록 하셨고, 굳은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했다고도 항의합니다(17).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으셔서 문제들이 불거졌다고 책임전가까지 합니다(18). 마치 시험을 잘 보지 못한 학생이 시험문제를 가르쳐주지 않은 교수를 탓하는 꼴입니다. 건강을 잃은 자녀가 때려서라도 꼭 필요한 건강식을 먹였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투정하는 꼴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이런 원망을 되풀이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고난도 더러는 있습니다. 가령 태중에서부터 허약한 몸, 질병을 안고 태어나는 경우도 그렇고, 기형아로 태어나 평생을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제 생각으로는,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가 아니라 우리 사람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그 질곡에서 벗어나 희망 가득 찬 미래로 달려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 없이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심한 척하다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들만 골라하는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형편이 좋은데,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고집하느라 되레 힘들게 살아가는 처지를 보면서 그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듯 대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친구나 이웃의 꾐에 빠져 헛된 삶을 살게 된 것이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때려서라도 붙잡아 주셨어야 옳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1960, 1970년대에는 박태선의 천부교와 문선명의 통일교에 포섭되어 학교가 정한 규율을 어기고 반항하던 학생들에게 중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 학생들 가운데서 옛 스승을 찾아와 이렇게 항변하더랍니다. “정말 스승이시라면, 밧줄로 묶어서라도 어리석은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핑계요 변명에 불과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기다리는 아버지/ 탕자의 비유>(15:11-32)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에 가득 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가 돼지우리에서 돼지의 짬빵을 먹는 고통을 맛보기 까지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훈계와 교훈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당신의 길을 잊지 않는 사람이 당신 눈에 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64:4)고 말입니다. 그리고 뒤늦은 회개의 고백을 합니다. “처음부터 당신께 반역하였기 때문이며,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기 때문이라”(64:5)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적인 생각으로 돌아와 고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죄를 기억하지 마십시오.”(64:8)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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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9(2025. 6. 9. 월요일).

시편 119:112-114.

찬송 46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시인 프란시스 윌리엄 버어딜론(1852-1921)<사랑이 끝날 때>란 시가 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하나뿐.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하나뿐. 하지만 한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끝날 때에는유치찬란한 시처럼 다가왔지만, 태양이 저물 때, 세상은 절망의 어둠이 되었고, 사랑이 끝날 땐 한 평생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뒤에야 위대한 시라는 걸 깨달았다.

 

2. “은총을 회고함(7-14)”을 읽었습니다. 무애/無涯 양주동 박사께서 쓰신 <어머님의 은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짓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1930년대에 가사에 감동한 이흥렬선생이 곡을 붙였다고 하니까 가사는 그 보다는 조금 더 일찍 썼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1: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이 노래를 건성으로 불었던 것을 후회할 때쯤이라면 나이가 제법 들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은혜라는 용어는 매우 특별합니다.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작심/作心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해 보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큰마음을 먹지 않고는 부모님의 은혜나 스승님의 은혜를 되살려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겠습니까? 이사야는 당연히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경험했던 일들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땅 가나안에서 이런저런 시련을 겪었을 때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온갖 곤경에서 구해 주셨고.” “기나긴 세월을 하루 같이 안아 주셨다.”고 회상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거룩한 영을 그들에게 넣어 주셨고”,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넘어지지 않게해 주셨다고 술회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8년이 되어서야 동기생들 20여명은 옛 스승 내외분을 수소문해서 서울로 모셨습니다. 선생님 내외분께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회 시간을 가진 후, 작은 선물도 드리고 노래도 부르며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예쁜 호텔에 하루 밤을 묵게 하시고, 이튿날 배웅까지 잘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몇 년 후에 선생님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셨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참 좋은 모습을 보여주시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좀 더 말씨도 어눌하지 않게, 얼굴은 한껏 건강한 체 로션도 바르고, 옷도 깔끔하게 입어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54년 만에 찾아온 제자들이 전망 좋은 <5월의 꽃수레>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대접받고, 좋아하는 가곡을 함께 불렀습니다. 5시간의 만남을 뒤로 하고 손을 흔들어 보내놓고, 이튿날 고마웠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항상 변함없는 그 모습 자체가 감사입니다.” 란 답글을 받고 좋은 기억으로 새겨진 것을 감사했습니다. 감사와 은혜가 실종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기억나는 선생님들이 여전히 많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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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8.

시편 119:109-111.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50년도 훨씬 전에 첫 번째 신학생 실습을 했던 옛 교회에서 제게 신앙지도를 받았다는 육순을 넘긴 초로의 할매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이냐 물었을 때, 엘리자베스 E. 디킨슨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대해가는 참새 새끼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헛되지 않은 삶은 아주 작은 관심과 배려만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2. 성령강림절의 행전 2:14-21을 본문으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재하실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베드로를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지를 똑똑히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두려움에 떨며, 무력감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역사 속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담대하게 세워주셨습니다(14-15).

우리는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지만, 매우 적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목자잃은 양떼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1:4).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숨을 죽이고 조용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마가의 다락방은 120명의 성도들이 지내기에는 매우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하셨던 말씀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셨고 거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렸는데, 뜨거운 불꽃과 강한 바람 속에 그들은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16).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과 완성이라는 준비된 내용이라고 말입니다. 1960년대 초반에 통일교회가 기승을 부릴 때, 그들의 전도자들이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존의 교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에게 붙잡혀서 난생 처음 시험에 들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구약/舊約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고 있고, 신약/新約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친다. 그러나 새 시대인 지금은(고전 13:12)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성약/成約의 시대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언의 말씀인 구약과, 성취의 말씀인 신약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17-21).

요엘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의 제9대 왕 요아스가 통치하던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에 등장하는 세례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한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너무 멀리 있다 생각하고, 가까운 곳에서 유혹하는 우상에 흔들려서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그 시대를 향해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야훼의 날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너희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예언을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언과 환상이란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절망과 두려움 한 복판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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