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00(2025. 6. 20. 금요일).

시편 119:144-146.

찬송 4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 인권선언> 2조에는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그 밖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차별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다원화된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탈북자, 특수 종교인 등은 우리 사회에서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소수자로 살아간다. 무시하지 못할 숫자이지만, 이들은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소수자들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살고 있다. 이들을 위한 인권은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 pp.12-19.

 

2. “수종병자를 고치신 예수(1-6)”낮은 자리에 앉으라(7-1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자료를 둘째 단락입니다. 서울에 올라오면 중고서점인 알라딘을 자주 들리는 편인데, 어제는 16세기의 철학자 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과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펴낸 <인간을 이해하는 9가지 단어>라는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특히 <인간을 이해하는>은 요즘 우리 사회적으로 그리고 교회 안에서 뜨겁게 회자되는 소수자의 문제를 다룬 책이어서 흥미를 가지고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힘든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대세의 물결에 휩쓸리면 크게 고민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살아갈 터인데, 굳이 쉽고 넓은 대로를 포기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윗자리를 서로 앉으려는 사람들을 보시고,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는데,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 혼주가 권하지도 않았을 때, 스스로 윗자리에 앉지 말기를 부탁하셨는데, 까닭은 나중에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설 경우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테니 얼마나 무안한 일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초대를 받았을 경우, 처음부터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좋겠다 시며, 혼주에 의해서 맨 아랫자리에서 조금 더 윗자리로 옮겨 앉게 되는 것이 명예롭게 보이지 않겠느냐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찍이 노자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이긴다.”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인생을 힘겨루기로 여기는 세상 탓에, 사람들은 아프게 살고 있습니다. 거칠고 굳센 인생보다는 부드럽고 연약해 보여도 꿋꿋한 인생이 강한 생명력을 지녔음을 우리는 깨우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했던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경기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때와 더불어 앉을 자리 설 자리를 가리고, 할 일과 맡은 일을 수행하는 일인데, 마치 토끼몰이 하듯 후리는 삶이라면 모든 일들이 고단한 짐이 될 뿐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고 연약한 새싹처럼 지닌다면 허황한 욕심이나 오만함에서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 백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이런 문제로 가슴앓이를 했던 모양입니다. 당나라 고종 때 장공예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집에는 9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3대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9대가 한 집에서 살 수가 있느냐? 그 비결이 뭐냐?"라고 물으니까, 장공예는 아무 말 없이 종이를 꺼내 놓고서 '참을 인()'자를 백번 썼다고 합니다. 이를 안중근의사가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太和란 유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겼습니다. 잘난 체 하고 싶고, 위세를 떨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더라도, 이를 잘 억제하고 잘 참는 사람이 자신은 물론 온 세상을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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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9(2025. 6. 19. 목요일).

시편 119:141-143.

찬송 1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구득/毋笱得이라는 말이 있다. 얻으려고 구차스럽게 굴지 말라 함이다. 구득/笱得은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 땀 흘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구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검/이다. 그래서 검소하지 않으면 누구든 도둑이 될 미래가 기다린다는 게다. 돈 앞에서 굽실거리는 사람은 천하다. 훔치는 것이 곧 구득이다. 예부터 투심/偸心만 버리면 행복은 아주 쉽다고 했다. 투심은 훔치는 마음을 말한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p.151.

 

2. “여우같은 헤롯(31-33)”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4-3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신대원 강의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젊은 목사들이 삼성 인턴생처럼 한다면 우리 교회가 부흥하지 못할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서울역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삼성의 전자제품을 손에 들고 외판원 노릇을 하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종로 3가에 가면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누더기 같은 손수레에 오색찬란한 성경구절을 적은 피켓을 끌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모습 말입니다. 그 학생은 신대원 수업에서 삼성 인턴들처럼 담력을 키우는 과목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신앙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골 5일 장의 핫 플레이스는 말투가 걸쭉한 약장수의 공연장이었습니다. 그 약장수는 믿고 먹을 만한 약 성분인지를 말하지 않고, 무조건 낫는다는 생각으로 먹어보라고 강요합니다. 어리벙벙한 시골 아낙들이 걸려들기 좋은 그물망을 쳐두는 것입니다.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신앙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두터운 신뢰가 바탕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전 삶을 송두리째 맡기는 도박과도 같은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서서 귓속말처럼 전합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여우에게 나는 오늘과 내일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고 전하라.” 고 당부합니다. 이 구절만 놓고 본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헤롯 보다는 예수께 우호적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헤롯을 여우로 묘사한 말씀과, 오늘과 내일 해야 할 일과, 사흘째 일을 마친다는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여우는 영리한 짐승들 중에서 몇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 여자를 여우 짓한다고 말하는데, 번뜩이는 꾀를 부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며, 상황파악이 빠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여우 짓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헤롯이라고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헤롯은 본래 광야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이두매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의 허수아비 분봉 왕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항상 유대인들 앞에서는 자신의 일천/日淺한 출신배경 때문에 자존심을 구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줄 다리기를 해야 하는 피곤한 처세를 해야 했던 것이, 여우 짓으로 묘사하기에 제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 해야 할 일과 사흘에 일을 마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써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말씀이고, 사흘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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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8(2025. 6. 18. 수요일).

시편 119:138-140.

찬송 2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애이지기악/愛而知其惡 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하라/, 그러나/, 잘못 사랑할 수도 있다/知其惡. 악은 잘못하는 짓이다. 사랑도 잘못하면 악이 된다. 부모가 제대로 사랑하면 선이다. 그러나 자녀를 무턱대로 사랑하는 맹목적인 사랑은 악이 될 뿐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대 더 준다. 이 말에는 아들딸을 제대로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왜 이런 속담이 생겨났을까?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자녀를 망친다는 지혜를 터득한 까닭이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pp.148-149.

 

2. “겨자씨의 비유(18-19)”, “누룩의 비유(20-21)”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22-3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을 택했습니다. 본문의 실마리는 어느 날 한 사람의 질문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되지 않겠지요?”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질문은 훗날 구원받을 사람으로 인/처진 사람이 144,000명으로 제한되는 구절(7:4)까지 등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구원받을 사람으로 인 처진 144,000명이라 함은 상징적인 숫자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숫자인가 해서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근거를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는데,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인침을 받게 된다고 적시/摘示 되어(7:5-8)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를 모두 합하면 144,000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숫자가 상징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대표적인 이단이 여호와의 증인과 신천지 집단입니다. 아무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좁은 문에 대한 이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였습니다. 가령 루터와 칼뱅의 개혁정신에 영향을 받은 영국교회는 16세기에 이르러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세울 뿐 아니라, 또 다른 혁신적인 교회를 찾게 되었는데 이른바 청교도주의의 교회였습니다. 이런 청교도 교회의 중심 내용은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성경주의,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았다는 교리를 믿는 예정론, 세상의 유혹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금욕주의, 화려한 의식이나 성직자 중심의 예배에 반대하는 예배의 간소화 등이었습니다. 이중에서 특히 금욕주의가 오늘 본문의 좁은 문을 해석하는 단초가 되었고,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다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육체적 사랑도 거부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마침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이 마치 천국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의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서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을 금하기를 바라실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열린 마음으로 주목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란 육체적인 욕망을 절제하게 하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일이나 가지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강조점은 더 크고 더 아름다운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내민 손과 같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과 기쁨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말입니다. 찰스 디킨즈의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구두쇠 스쿠리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전야에 꾼 꿈에서 동업자 말리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뉘우친 후, 크리스마스에 빈민들에게 재산을 나누는 그 다른 차원의 행복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행동인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고난과 시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섬기고 희생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은 팔을 안으로 움켜쥐는 탐욕의 삶이 아니라, 팔을 밖으로 내미는 섬기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구체적인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나만의 작은 기쁨인가? 아니면 더 많은 사람이 누릴 큰 기쁨인가? 하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7(2025. 6. 17. 화요일).

시편 119:135-137.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텅 빈 방 안에 있다. 장자는 텅 빈 방이 태양을 낳는다(虛室生白).고 했고, 텅 빈 것에서 즐거움이 나온다(樂出虛) 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청빈의 삶을 으뜸으로 삼았다. 청빈은 궁하게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청빈이다.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장작불처럼 물욕을 철저하게 다스리면서 검소하고 수수한 인생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청빈이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p.125.

 

2.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10-17)”을 읽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이른바 613개의 율법은 하라는 긍정적인 것은 248개이며,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것은 365개입니다. 그 중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이 안식일에 관한 시행세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39가지로 부정적인 내용입니다. 씨 뿌리기, 밭 갈기, 곡식 추수하기, 곡식 묶기, 곡식 타작하기 등에서부터, 염색하기, 실뽑기, 실 끊기, 매듭짓기, 곡식 빻기, 곡식 체질하기, 반죽하기, 빵 굽기 그리고 글씨 쓰기, 글씨 지우기, 불 끄기, 불 켜기도 해선 안 될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야 했습니다. 오래 전에 영화를 보는데, 미국의 한 청교도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이렇게 광고를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모두 집에 돌아가셔서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여러 가지 연장을 가지고 다시 교회로 모이라는 것인데, 엊그제 호주에서 한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집이 없어서 그분들의 집을 지어주자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주일 오후에 교회 부근의 한 공터에 집을 한 채 짓는 일을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일을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 곧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일이었으며, 배고픈 사람들에게 밀 이삭을 잘라 먹도록 배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릴없이 무작정 노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 그리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로 인해서 많은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의 병을 고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에서 어떤 병자의 병명을 말할 때 귀신들렸다는 진단(?)이 많이 등장하는데, 1세기 당시의 의학적인 상식이나 진단으로써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해서는 귀신 들렸다는 표현이 적절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정신 질환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에 대한 일반적인 진단(?)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입니다. 아무튼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진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을 주님께서 안수하시고 고쳐 주셨으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할 놀라운 기적이었고,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시빗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날을 굳이 안식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엿새 동안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위선자들아!”라고 호통을 치시며,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면서 18년 동안을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 여인을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말라는 말이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들 역시 실제적인 면에서는 안식일에 해선 안 될 일을 했다는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유대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누구도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죄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삼스럽게 율법이 역할에 대해서 진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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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6(2025. 6. 16. 월요일).

시편 119:132-134.

찬송 3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리/ fly를 제목으로 시를 쓴 사람은 영국의 시인 W. 브레이크(1757-1827)입니다. “작은 파리야 여름날 네 노는 것을 무심한 내 손이 쓸어버렸구나. 나는 너 같은 파리가 아니냐? 아니면 네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냐? 그 어떤 앞 못 보는 손이 내 나래를 쓸어내는 날까지 나도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를지니. 생각함이 삶이고 힘이고 숨결이라면, 생각하지 않음이 죽음이라면, 그렇다면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는 행복한 파리.” 인생을 달관/達觀한 사람처럼 여유롭나 느꼈습니다.

 

2.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1-5)”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6-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회개라는 성경용어는 독특합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정신활동만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선다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잘못을 깨닫거나 뉘우치는 정도로 사면하거나 용서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시절에는 적어도 고교생이 남녀교제를 하는 것에 대해서 엄한 벌로 다스렸습니다. 선배 중 한 분이 이웃에 위치한 여고생과 교제를 했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부산의 한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는 교장 선생님의 친구로 한국에 나와서 학교를 돕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의 양아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한 선교사는 그 일로 돕던 모든 일을 멈출 뿐 아니라, 학교를 돕고 있는 미국의 후원자들에게도 교장선생님을 비난하는 선전을 하여 학교가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친구인 선교사님은 무릎에 피가 날 정도로 학교 건축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고교생이 되면 자신의 연애상대를 택할 수 있고, 교제를 한다고 해도 크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1960년대 초반의 한국 상황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라고 많은 논쟁을 거쳤지만, 평행선을 긋다가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회개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이 선교사님의 주장이었고 말입니다. 훗날 이 선배는 제가 주일학생 때 가르쳤던 제자와 결혼해서 한 교단의 총회장까지 지냈습니다. 회개의 삶을 실천한 분이라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교장선생님은 보질 못하고 별세하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희생제를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 하신 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죽은 사람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며,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이 적시하는 초점은 빌라도에게 학살당해서 빌라도의 제물에 그 피를 섞었던 사람들의 죄나,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18명의 죄가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데, 죄의 경중/輕重을 따질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 하듯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를 따져보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나 경중이 아니라, 그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죄의 크기와 무게로 헛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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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5.

시편 119:129-131.

찬송 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괴테의 <충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괴테는 행복이 저 구름 너머에 또는 저 높은 산 너머에 있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삶에 셀 수 없이 많이 널려 있는데 잡지 못할 뿐이라고.

 

2. 성 삼위일체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8:48-59을 본문으로 성경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에 관한 말씀들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예수께서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라는 신학의 풀이는 믿음으로 접근하라고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1세기 유대 갈릴리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48-51).

갈릴리 주변을 수 천 수만의 사람들로 들끓게 만들었던 젊은 예수는 온 나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13) 직업적인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의 신앙을 흔들었고, 산상수훈의 말씀들은(5-7)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청량제와 같았으며, 기존의 율법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즉결 처단하려고 했을 때(8:1-11) 하신 말씀이나,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석(10:25-37)은 사람들의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젖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에서는 천국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출현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당시의 유대 사회는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52-59).

어느 시대나 영웅 숭배나 초인사상이 있어왔습니다. 그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든 불의를 물리치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행적에서 사람들은 이 같은 초인사상을 품다가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 중심의 세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가르침과 행동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미쳤거나 마귀 들린 사람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앙의 영웅 아브라함과 비교하게 되었고, 예수는 주저 없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보려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교파들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교파에서는 사도신경이나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협의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광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만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들과,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먹어도 된다는 이들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해들을 잘 정리해 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학이 없는 교파에서는 많은 이단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일하고 계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삼위요 일체인 신학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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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4(2025. 6. 14. 토요일).

시편 119:127-128.

찬송 4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의 마지막 두 연을 옮깁니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2. “야훼께서 시온에게 위로의 말씀을 내리시다(5-14)”을 읽었습니다.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둥을 붙잡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 자신이 말씀으로만 자신의 백성들과 교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간 중간에 야훼께서 말씀하신다.”(5, 9, 12)는 구절을 삽입하고 있는데, 까닭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억해야 하고 순종해야 할 삶의 규범이 되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잊었으며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서 잘못된 삶을 살아가곤 하였던 것입니다. 며칠 전 저를 찾아왔던 옛 주일학교 학생들은, 오래 전의 제가 했다는 말들을 기억하며 회상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말의 의미와 힘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를 신약신학으로 인도해 주셨던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주 한 밤중에 밖에 나와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게.”라고 말입니다.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는 별들처럼 주변 세상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꾸벅꾸벅 그날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가자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은, 그분들의 말씀을 떠올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은 다양했습니다. 빈정거리며 따돌리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 다독여 주시고, 도시들에게 아우성치고 성전에서 울부짖는 소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보복하시는 소리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통곡하였지만, 도리어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마음이 흐뭇해지고, 뼈마디가 새로 돋는 풀잎처럼 싱싱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채전에 물주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이 세 포기 중 두 포기는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제법 자랐는데, 그리되고 말았습니다. 부추와 상추를 제외하고는 누렇게 잎이 떠가고 있습니다. 고추는 너무 불쌍한 모습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중입니다. 오늘 내일 하며 비를 기다리는데, 철부지 인간들은 가족 여행을 잡은 날에 비가 올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우리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비를 내려달라 구하는가 하면, 비가 와서는 안 된다고 반대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서둘러서는 안 될 이유를 배워야 합니다. 저는 성탄절이 지난 나흘 후, <무고히 순교한 영아들을 기억하는 날>에는 뜻 모를 하나님의 섭리에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그 철모르는 영아들이 주님의 피난을 도와준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뜻 모를 고통도, 뜻 모를 아픔도 없을지 모르겠다 생각합니다. H. W. 롱펠로우는 그의 <화살과 노래>에서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느티나무에 나는 보았다. 아직 꺾이지 않은 채 박혀 있는 화살을.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동무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을 나는 들었다.” 고 말입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라 생각되어도, 먼 훗날 느티나무에 박힌 화살을 보고, 먼 훗날 친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노래를 들을 때가 오리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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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93(2025. 6. 13. 금요일).

시편 119:124-126.

찬송 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잎은 많지만 뿌리는 하나, 내 청춘의 거짓된 허구한 나날을, 햇빛 속에 잎과 꽃들은 흔들었지만, 이제는 시들어 진실 속에 파묻히련다.”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1865-1939)<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입니다.

 

2. “야훼께서 그릇된 예배를 심판하신다(1-4)”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게 예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물론 종교들 마다 저들 나름의 예배가 있고, 그 원리와 원칙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예배가 낯선 것은 그들의 원리와 원칙을 잘 모르는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 기독교회만 해도 교파마다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45년 전에 독일 뉴우런백 교회의 날 행사(일주일간)에 참석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개회 예배를 어느 너른 공원 잔디밭에서 열렸는데, 갑작스럽게 아프리카의 경쾌한 음악이 들리더니 한 무리의 색채 찬란한 탄자니아의 성가대가 찬송과 엉덩이춤을 추면서 입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무도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신바람 나는 찬양과 엉덩이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마음과 몸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던 저는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입니다. 그때 저는 많이 놀랐으면서도 그들의 예배를 이해하려고 힘썼습니다. 예배는 예배자들의 문화를 최대한 반영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른바 예배의 두 요소, 하나님께서 예배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성례전적인 요소들과(Sacramental elements/ 성경봉독, 설교, 축복선언 등) 함께,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바치는 것을 말하는 제사적인 요소(Sacrificial elements/ 기도, 찬양, 감사 등) 중에서, 적어도 제사적인 요소만은 이른바 토착화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읽거나 설교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진정과 경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와 찬송 같은 것은 예배자들의 삶의 배경과 무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감사를 여과 없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예배 가운데서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서,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아니라 서양의 문화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려준 분이 판소리 명창 고 박동진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느 핸가 성탄절 특집으로 판소리 한 마디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일행이 예수님을 낳으려 마구간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여봐라 사람들아! 하나님의 아드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누구도 만삭의 마리아를 환영하지 않는구나! 이럴 수가 있느냐? 이래서는 안 되지 않으냐?” 단 몇 마디에 마음이 송두리째 울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예배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종교들처럼 하나님을 삼신 할매나 옥황상제를 모시듯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이지 않게 언제든지 제물에 의해서 마음을 바꾸거나 돌릴 수 있는 그런 바윗덩어리처럼 여기는 일입니다. 엘리야와 기도 대결을 벌였던 바알의 제사장들처럼 광란에 춤을 추는 것이 그런 예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러 고민하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천편일률적인 자기만족에 취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룡산을 오르는 길목에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 미륵불이 있는데, 그곳에는 많은 제물들이 차려져 있곤 했습니다. 이런 것은 민간신앙과 결합되어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온갖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하겠으며, 책을 들고 있는 학사 여래 미륵불도 있는데, 그 앞에서 소원을 빌면 대학에 합격한다는 것 또한 민간신앙과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우상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열심히 예배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제는 소위 수능 기도회가 연중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서울 의대와 이화여대 의대에 남매를 합격시킨 부산의 한 권사님은, 자녀들이 공부하는 동안 그들 곁에서 뜨개질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간증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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