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95(2024. 5. 11. 토요일).

시편 시 65:6-8.

찬송 1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을소 시인은 늦깎이로 문단에 등장했지만, 10권 이상의 시집을 냈다. 그의 눈이 어린 손녀에 꽂혔던 어느 날 이런 시를 썼다. “나는 혼자라네. 엄마 아빠 있어도 슬프고 외롭다. 엄마 아빠 일하러 가고 나면. 보고파도 볼 수 없어. 나는 언제나 혼자. 엄마는 공부하러 간다고 밀라노로. 아빠는 회사일 바쁘다며 울산으로 서울로. 다 떠나버려 나는 외톨이. 때때로 슬픔이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다네. <중략> 그러나 이 세상엔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을 바꾸기로.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할머니 말씀같이.”

    어린 손녀에게 고독을 가르친다거나, 외로움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무거운 주제여서, 가장 쉬운 말로 이웃들을 소환한 것이리라. 혼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지혜이고 행복이라고 말이다. 다행이 손녀가 그걸 눈떴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을소 시집, <외출>, pp.90-91. 박성완 24. 5. 10.

 

2. “칠십 장로가 주의 영을 받다(16-17, 24-29)”을 읽었습니다. 최근 어느 유명 논객이며 유튜버인가 어느 당을 향해서 성령이 나간 당이라는 혹평을 해서 그분이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분이 말하는 성령이란 바탕이 되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추측해 봅니다. 그분은 무종교인이라 스스로 밝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누군가의 연설이나 글의 논조를 보면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 기독교적인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없진 않지만, 좋은 분위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수 풀씨처럼 생겼고, 브델리움(노르스름한 색) 같은 만나를 주셨음에도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러자 모세는 어찌하여 제가 낳지도 않은 이 백성을 제 어깨에 지워주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신 하나님은 그들이 코에서 고기 냄새가 나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만들어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모세는 또 투정을 부립니다. 어떻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60만 대군이 이 백성에게 다 먹을 수 있는 양의 양고기 소고기를 주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 70인을 데리고 오라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막을 둘러 서 있는 70인 장로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성령을 주셨고, 그들은 모두 입신/入神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장로 명단에 있던 두 사람, 엘닷과 메닷은 모세를 따라 성막으로 가지 않고 진중에 남아 있었는데, 그 두 사람에게까지 성령이 임해서 진중에 있는 백성들 앞에서 입신하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 두 사람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고했으나,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질투하지 말라고 타일렀다는 대목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구약에서는 흔치 않는 집단 입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구하지도 않았던 70인 장로에게까지 성령을 주신 것일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 본문에서는 남이 가진 선물을 보고 질투하게 하는 어린애 같은 생각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행 1:8을 비롯하여 요 14장고 16장에서 성령의 역할을 잘 풀이하고 있는데, 성령을 주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것과,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증거하게 하시며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고, 어떤 행동을 금하게 하시고, 중재하게 하시는 등 수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든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른다든지, 죄를 죄로 깨닫게 된다고 하면, 이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다른 성도와 다른 낯선 모습, 방언을 말하고 병을 고치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예언을 하는 것을 성령의 역사/役事로만 배웠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는 많이 변질된 요소라 하겠습니다. 죄를 죄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모든 의지와 마음과 생각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어제는 대학 동기인 <굿네이버스>의 창립자인 이일하목사님의 초청으로 굿네이버스 활동을 둘러보았고, 오늘은 대학 졸업 50주년을 축하하는 연세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모교를 방문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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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4(2024. 5. 10. 금요일).

시편 시 65:4-5.

찬송 4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사형집행만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제대로 된 지식인이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가장 값진 삶을 살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윤선도나 정약용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재능을 발휘해서 후세에 남길 명시도 짓고 백성들을 깨우치는 글도 썼을 것입니다. 6세기 로마의 지식이이며 원로원의원이었던 보에시우스(A. D.480-525)도 그런 마음으로 <철학의 위안>이란 책을 썼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배지에서 한가롭게 명상을 하고 시를 쓰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절절한 생각을 글로 썼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는 하루하루가 죽음의 사자가 들이닥칠 것 같은 초조함으로 한 순간 한 순간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에는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라도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권세에 대한 야망 때문에 독성/瀆聖을 저지르면서 양심을 더럽혔다고 허위를 조작해 냈습니다. <중략> 당신은 날마다 내 귀와 생각에다가 신을 따르라는 피타고라스의 금언을 일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이 애써 신에게 흡사하리만큼 고상한 경지로 연마하여 놓은 나를 저속한 자들의 농간이 감히 침범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나의 고결한 가문과 신의 깊은 친구들과의 사교/社交, 그리고 당신처럼 성스럽고 존경할만한 나의 장인/丈人 심마쿠스 등은 나를 이러한 모든 죄의 혐의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그들은 당신이 내 죄의 동기가 되었다고 믿으며, 또 내가 당신의 가르침에 능통하고 또 당신의 덕으로 수련되었기 때문에 악행을 쉽사리 저지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일들은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들 삶에는 죄가 너무 많이 더부살이를 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변명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보에시우스, 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 pp.39-40. 박성완 24. 5. 9.

 

2. “한나의 감사 찬양(1-10)”을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본다던지, 아니면 앞에만 보고 뒤는 바라보지 않는다던지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오해를 잘 하거나, 심지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곡해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여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서도 이런 안타까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나가 독한 마음을 먹고 성전 기도를 결심한 대목을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는 엘가나란 에브라임 사람의 첫 번째 정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두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는데, 둘째 부인인 브닌나는 아들을 낳아 여인의 역할을 다했다는 식으로 교만했고, 첫 부인 한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을 생각해서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자 한나는 서원기도,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낳았고, 한나는 젖을 떼자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를 그 금덩이 같은 자식을 성전에 떼어놓고 돌아서면서 지은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나의 노래는 신약 성서 눅 1:46-55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와 너무 닮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는 모든 거만한 자들의 입을 닫게 합니다. 셋째는 용사의 활을 꺾고 비틀거리는 군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넷째는 배부른 자들을 품을 팔게 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다섯째는 아이 못 낳던 여인에게 일곱 남매를 주시고 아들 많은 여인의 기를 꺾으십니다. 천민과 빈민을 높이 들어 쓰시고, 여섯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의 걸음은 지켜주시고 불의한 자들의 앞길은 캄캄케 하신다고 노래합니다. 한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 처음 가졌던 한 풀이에서 끝난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한나의 삶에서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참된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삶으로의 출발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경험했던 한 맺힌 삶을 뒤집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성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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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3(2024. 5. 9. 목요일).

시편 시 65:1-3.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별주부전>을 보러가는 사람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가는 사람은 눈물 보자기를 준비해야 하는가 여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웃음을 기대하는 사람과 눈물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는 애통하는 자의 복이 있다. 애통한다는 말은 애간장을 끓이며 슬퍼하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애간장을 끓이며 슬피 우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남의 일이긴 하지만, 그 서러움은 왠지 모르게 우릴 슬프게 한다.

    마태복음서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5:4), 누가복음서에서는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6:21). 가난한 것이 반드시 복이 아닌 것처럼, 모든 슬픔에도 위로와 복이 오는 것도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슬픔이란, 냉소와 절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슬퍼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슬픔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위로를 발견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슬픔 속에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세상을 다 잃은 듯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등을 토닥여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힘과 위로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2. “다니엘의 꿈 : 네 짐승(9-14)”을 읽었습니다. 유독 꿈을 자주 꾸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바닷가 고성에서 이사해 오신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그 전날 밤에 꾸셨던 꿈 얘기를 하면서 해몽을 요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도 나고 그 분의 삶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을 가졌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다 보니 제 밑천이 다 들어나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꿈을 거의 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일 꿈에 시달리는 분들을 보면서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생활의 고통도 모자라 꿈속에서 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주인공 다니엘 역시도 제대로 잠 못 이루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가 꾼 꿈은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꿈이었습니다. 네 짐승이 등장하는데 사자 몸뚱이에 독수리 날개를 한 생물이고, 두 번째는 곰 몸뚱이에 갈지 세 개를 물고 있으며, 세 번째는 호랑이 몸뚱이에 머리가 넷 옆구리에는 새의 깃털 달려있습니다. 네 번째는 형용하기 힘든 무서운 짐승인데, 쇠로 된 이빨을 가졌고,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서 바라보니 열 개의 뿔들 사이에서 작은 뿔 하나가 솟아나 먼저 나온 뿔을 뽑아내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뿔이 계속 건방진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짐승은 처형을 받아 불속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또 꿈을 꾸었는데, 사람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데, 모든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모든 백성들에 의해 섬김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반부에 나오는 기괴한 네 짐승의 꿈은 심판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인데 반해서, 후반부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에 관한 꿈은 재림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과 심판이라는 성경의 대 주제에 대해서 종종 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취해서 아니면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다들 잊고 사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심판과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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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2(2024. 5. 8. 수요일).

시편 시 64:8-10.

찬송 1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자원봉사자 교육에 열정을 쏟아 붓던 1980년대 초만 해도,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돈 한 푼 소득 없는 봉사라는 말을 낯설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경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많은 봉사자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을 주변만이 아니라, 수해가 난 지역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어려움을 겪는 외국에 까지 원정 봉사를 가는 이들까지 생겨났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힘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도 다양한 이유와 사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를 찾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안젤로는 캘커타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비사교적인 이탈리아노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흔히 떠벌리기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죠. 안젤로는 항상 조용했고, 항상 제일 끝까지 일하는 봉사자였습니다. <중략> 저는 안젤로의 모습에서 저를 떠난 한 친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비극으로만 보았던 한 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중략> 안젤로에게 인생은 장밋빛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안젤로로 하여금 장밋빛 인생을 믿지 않게 만들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자신의 삶이 어둡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또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우리들은 선한 삶에 눈을 뜹니다. 그런데 자신의 변화는 물론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슬픈 인생들도 있습니다. 조병준, <내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pp.43, 45. 박성완, 24. 5. 7.

 

2. “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화 2(27-42)”을 읽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가령 부모에게 순종하고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모나게 살지 않으며, 묵묵하게 자기 역할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무미건조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나 스승에게 불순종하고, 못된 일만 일삼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쁜 소행의 사람들 말입니다. 특히 말없이 자기 가정을 잘 보살피며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자기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 그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말을 듣는 이들은 삼시세끼 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할뿐더러 자녀들도 공부를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전옥답에 수목이 울창한 앞산을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서 몸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자녀들이 잘못되거나 생활고를 겪어야 정상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한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노해서 다른 이 보다 일곱 배나 더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고, 성소를 쑥밭으로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원수들로 하여금 그들과 살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죗값까지 받게 하고,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가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참 무섭고 떨리는 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당시에는 웬지 모르게 빈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수천 평의 땅을 물려받고, 죽을 때까지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어려움 없는 평탄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전에 벌써 자녀들이 명절이나 가정일로 모이게 되면 대판 싸움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고, 형제 자매간에 의절을 하고 부모님께도 여간 못된 일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고 어머니 속을 후벼 팠던 저의 백부님은 마침내 항복하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가 이겼다. 나도 예수를 믿을란다.”하고 말입니다. 저의 백부님은 여든이 다 되어서 명예 집사님이 되시고 평안히 별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뜻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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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1(2024. 5. 7. 화요일).

시편 시 64:5-7.

찬송 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처럼 남대문 시장엘 갔습니다. 제가 안경을 맞추는 곳이 거기에 있는데, 누워 지내는 일이 많다보니, 안경을 벗어둔 걸 깜빡하고 안경다리를 늘어트린 것입니다. 다행히 안경다리에는 금이 가거나 상처가 나지 않아서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곳만 이용하니까 혹시 조금 싸게 맞출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 입구에 있는 안경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늘어졌는데 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 말하니까, 여자 주인이 이거 부러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전혀 기대 밖의 얘기였습니다. 부러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얼른 되돌려달라고 한 후, 다리를 고친 후 안경을 맞출 생각을 했는데, 아닙니다. 하면서 한참을 더 가서 원래 맞춘 집으로 갔습니다. 젊은 주인은 알아보고 앉아 계세요. 곧 고쳐드리겠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똑 같은 안경테로 요즘 얼마면 맞출 수 있어요?’ 물으니까, ‘아직은 쓸 만하니까 한 1년 후에 오세요. 옛날 값으로 해 드립니다.’ 좋은 집을 골랐구나, 안심했습니다.

 

2. “야훼를 바로 섬기는 사람에게 내리는 복(1-13)”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화(14-20)”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많이 생각해 왔고 얘기해 왔던 것들이 정리가 되는 듯 하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첫째 제 때에 비를 내려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땅을 소출을 내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고, 그것들을 먹고 안심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평화를 주실 것인데 다리를 뻗고 잠잘 수 있도록 말입니다. 원수들을 너희 땅에서 몰아내시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셋째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 하십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 참된 신이신 야훼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주인으로 계신다는 것은 복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 이를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느 종교인들처럼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때에 비를 내려주셔서 땅과 나무 그리고 뭍과 물에서 필요한 수확을 거두는 일이라고 하니, 거기다가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는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꿈에도 그리던 천국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 이유는 소박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벽 동이 트는 시간에 못자리판에 물을 가득 가득 채운 논들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50, 60년 전만 해도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리거나, 초봄에 비라도 부족하면 항상 못자리판까지 쩍쩍 벌어져서 근심에 쌓이곤 했는데 말입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명시 <피파의 노래>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모나지도 톡톡 튀지도 않은 부드러운 시어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을 소환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날 대체 휴일에 종일 조용하게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포근해 지는 저녁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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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0(2024. 5. 6. 월요일).

시편 시 64:1-4.

찬송 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유독 복이라는 말을 많이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민족은 중국인과 한국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선물 둘은 복/자를 천에 수를 놓은 글귀였습니다. 복이란 밖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별의 별 모양의 복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거나(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에 관심을 쏟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적이고 인격적인 상황을, 가난하다는 말은 삶의 외적 형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심령이 가난하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 곧 하나님의 도움이나 은총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18:9-14).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의 장점들을 자랑스럽게 남김없이 열거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신의 단점을 부끄럽게 여기며 기도드립니다. 대부분의 자랑쟁이에게서 발견하는 내용은 자기 자랑이 넘쳐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금물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숨을 죽이고 작은 소리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고해하듯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박성완, 24.5.5.

    ‘천국은 영광스러운 복지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사람들은 그분의 자녀답게 처신하는 그런 영역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나라의 참된 시민이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축복이 지금 그들의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 만이 아니고, 여기에서 지금 사람의 마음이 바쳐진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 로버트 슐러, [현대인을 위한 팔복과 십계명], p.45.

 

2. “희년에 관한 법(35-55)”을 읽었습니다. 희년이란 히브리어로 요벨(Yobel)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인데,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희년은 710일 속죄일에 선포되었습니다(레위기, 25:8-10). 오늘 본문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은 가난하게 살게 된 자기 민족을 구제하고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사회제도로, 돈이나 양식을 빌릴 경우에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고, 양식도 장리로 꾸어주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근본정신은 그들이 남의 나라 이집트에서 종살이 했던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된 동족을 종이나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고 식객처럼 살게 하고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그의 자식들과 함께 자기 지파를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제도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공동체는 해외에서 이민을 오거나 다른 지방에서 실패하고 찾아온 유대인이 있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그들의 재기/再起를 돕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고 하니,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도 연구해 볼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차제/次第에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을 정신을 잘 연구해서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이 지적하는 희년의 구체적인 정신은 집과 노예와 부채면제로 분류해서 살필 수 있습니다. 예나 제나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한번 팔면 되물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위 부동산 투기물이 된다는 점에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인의 집은 1년 안이면 무를 수 있고, 레위인의 집은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도록 하였습니다(25:9-34). 그리고 희년이 되면 유대인이 부리던 노예들에게 다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29:39-41). 마지막으로 삶을 무겁게 하던 부채도 안식년에는 면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15:1-3). 이런 희년의 정신의 밑바탕에는 그들도 무려 430년이라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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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9.

시편 시 63:8-11.

찬송 3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언제나 여러 종류의 신들을 섬겨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신이었던 바커스를 오늘까지도 추종하고 있으며, 사랑의 여신이었던 비너스는 성 도착증에 걸린 20세기에 와서 널리 부활되고 있다.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는 다시 한 번 영광의 지위에 올라 있음을 본다. <중략> 당신의 신은 누구인가? 나름의 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신 지향적인데, 그것은 인간이 가진 공통적인 불안감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거짓 신을 만들어냈는데, 그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이라는 신이다.’             로버트 슐러, <현대인을 위한 팔복과 십계명>, pp.134-135.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일 5:1-8을 본문으로 세상을 사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강한 힘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학교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선택하고 도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힘이 찾아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에 대한 오해/誤解와 곡해/曲解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4-5).

신앙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믿음 때문에 많이 속았거나 낭패를 본 사람들의 경험적 주장이지만, 오해입니다. 자신의 우상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일반 종교인과 나름 자신의 아이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곡해입니다.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유일무이하신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이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이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역동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1-3).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이 믿는다는 말이 모호하게 들릴 때가 많습니다. 첫째는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믿음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흔히 부흥회에서 성도들이 주문처럼 외우는 믿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아멘이런 말들은 믿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들립니다. 둘째는 기도자의 능력이나 노력 또는 의지에 따라서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듯 생각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그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2:8)이라고 밝히는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자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며,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동성을 발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6-8).

우리는 남을 누르고 짓밟는 행위가 승리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갈멜산 정상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엘리야가 사탄들을 밟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승리와는 많이 다른 승리가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실패한 역사처럼 보이지만, 십자가는 이 세상을 이긴 최초의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를 넘어트리고 죽이는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사건이 참된 승리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나, 자신을 거룩한 성찬의 제물로 사람들의 가슴에 새긴 십자가 사건은 세상이 깨우쳐야 할 참된 승리입니다. 성경과는 다르게 지난 2천년동안 우리 기독교회는 세상 사람들처럼 정복과 수탈에 의한 승리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과 섬김의 승리의 본을 따를 때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님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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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8(2024. 5. 4. 토요일).

시편 시 63:4-7.

찬송 2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떠올리는 방법인지 모른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도움을 청했던 부산 개금동의 한 노인정의 회장님이셨다. 첫 번째로 신문을 거꾸로 읽으라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치가들의 얘기도 거꾸로 읽어보라 하셨다. 그러다 55년도 훌쩍 지난 어느 날 또 한 번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 누리 교수다. 왠지 엇박자 놓기를 즐기는 듯한 화법인 그 분의 책은 계속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책을 놓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다. 그 책의 여는 주제는 <병든 사회에서 거울보기>라는 주제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11월 독일에 유학중이던 김 교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자신을 말하며, 그 때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을 마주하게 되었다 합니다. 냉정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때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다. 살인적인 경쟁, 승자 독식의 정글 속에서, “그동안 정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이 혹시 비정상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로 본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현상을 꼽고 있고, 다음 하나는 통일에 관한 이해가 우리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박 성완, 24. 5. 3.

 

2. “축절들 2(23-44)”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명절도 소개되는데, ‘새해맞이(23-25)’죄 벗는 날(26-32)’ 그리고 초막절(33-44)’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세 번째 단락인 초막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숙곳(sukkot)이라고 불리는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절기 중 가장 기쁜 절기로 속죄일(Day of Atonement) 이후 5일이 지나서 시작된다.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진행되며,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섭리를 기념한다. 레위기 2334~4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추수의 마지막에 절기를 정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첫째 날과 마지막 날에 일상적인 업무를 쉬는데, 그 일주일간을 초막에서 지내며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알게 하려하심이다. 고대에 행해졌던 3가지 의식은 물 긷고 따르기, 등 밝히기, 장막 짓기 등이다. 처음 2가지는 성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진 후 이러한 전통들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초막을 짓고, 최소한 그 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숙곳을 기념하고 있다. 나뭇가지나 과일, 예술품 등으로 이곳을 꾸미는 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통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의 이면에 놓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숙곳은 기쁨의 절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떠돌 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는 그분의 궁극적인 섭리를 받아들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뉴스에 따르면, 2017106일부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막절에는 약 6,000명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일보>, 20171012일자 기사 발췌.

    저는 3.1 절이나, 광복절 그리고 한글날과 개천절 등을 지낼 때마다, 많은 아쉬움을 갖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그냥 창밖에 태극기를 내다 거는 날 정도로 생각하게 될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3.1절에는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도 만들어 보고, 백범 선생 등 독립 운동을 한 선열들의 얘기를 들려줘야 하며, 광복절에는 가슴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뛰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날에는 한글 시낭송회를 개최해 보거나 한글을 배우러 외국에서 온 분들을 초대해서 한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개천절에는 단군 신화에 얽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발췌하도록 숙제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우리의 명절이 우리의 현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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