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1425(2005.4.11. 월요일)

시편 9:13-16.

찬송 26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정확히 영업을 마칩니다. 하루의 삼분의 일은 반드시 운동을 즐기거나 지역 자원 봉사단체에서 일을 합니다. 따라서 한 주일에 일하는 시간이 40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빚을 져서 확장하지 않습니다. 돈을 빌리게 되면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섞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투자한 만큼 돌려받고 싶은 마음에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1년에 한 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가를 떠나야 합니다. 이를 어기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인해 경쟁의식이 싹틀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는 의지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톰 멕마킨이 쓴 [세상에서 가장 맛이 있는 빵집 이야기]라는 책에 과연 이렇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빵집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이야기이구요. <그레이트 하비스트>라는 빵집이 운영되는 방식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적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레이트 하비스트>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 빵집들의 매출은 매년 10에서 30%씩 정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마음이 심란할 땐, 이 사람들을 기억해 보는 것, 마음의 방향을 잡아가는데 좋은 나침판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46일 방송>

 

2. 고향이 낯선 사람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일 수도 있고, 고향에서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후자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30여년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 못 본지 불과 몇 달 사이에 유명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면, 그 시차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진 새로운 모습보다는 익숙했던 옛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머리에 새겨진 오래된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혼란을 줄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따뜻한 눈길로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악의적이거나 마음이 꼬여서만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익숙함을 흔드는 낯선 새로움에 대한 조정기 쯤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기면서도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애써서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고향과 타향의 차이는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큰 간격을 나타냅니다. 고향집 구석구석에는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숨결들이 들려오는 듯하고, 고향 마을 골목마다에는 그리운 친구들 얼굴이 몰려나옵니다. 비탈진 밭고랑을 지나갈 때면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의 바쁜 손놀림이 지워지지 않고 떠오릅니다.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며 멱 감던 냇가가 너무도 변해 버린 것을 바라볼 때는 한쪽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고향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현실을 맞아들일 것을 촉구하십니다. 비단 과거는 과거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시차를 분명히 구별하려는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와 현실을 바르게 연결지어야 한다는 역사인식이 절실하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는 때문입니다. 그 과거가 바로 오늘로 이어져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슬픈 역사를 만들 수밖에 없는지를 예를 들은 말씀이 25-2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860년 전 엘리야 시절에 이스라엘 나라에 3년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야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시돈 땅의 한 이방인 과부였고(왕상 17:8-24),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지만, 엘리사의 도움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 이었다(왕하 5:14)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실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적은, 과거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픈 상처를 떠올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픈 상처를 치료할 생각보다는 그냥 덮어두고 모른 체 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화려했던 과거가 어찌하다가 이런 초라한 현실로 전락했을까를 따져보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문제가 있었다가 보다는 과거에서 현실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반성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제사장의 나라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라면, 언제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자기반성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우리 아이들이 빗나간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모의 구실은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과거가 현실로 전이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3. 오늘도 봄 대심방이 계속됩니다.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목련까지 함께 피어있는 아름다운 봄입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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