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9호 (2007. 6. 14. 목요일).
시편 시 98:5-9.
찬송 42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유기]는 삼장법사가 손오공과 적팔개를 데리고 인도로 불경을 보러간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요. 손오공과 적팔개의 이미지 때문에, 내용 자체도 왠지 가벼울 것처럼 느껴지는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지요. 81가지의 고초를 겪어가면서, 경전을 찾아가는 과정과 결과에는 손오공과 적팔개로 인한 우스꽝스러운 소동에 견줄 수 없는 심오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숱한 고초 끝에 마침내 인도에 도착해서, 드디어 아난과 가섭으로부터 불경을 받은 세 주인공. 당연히 더 할 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었지요. 그런데 그 경전은 무자 진경(無字眞經)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경전이었지요. 그나마 나중엔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까지 합니다. “최고의 경전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한 존재가 도달해야 할, 도달 할 수 있는 경지란, 무념, 무상, 무욕의 세계란 뜻일까요?” 아무튼 이 이야기 때문에, 이후 무협지나 영화같은 데는 최고의 고수가 남긴 비법에, 실은 아무 것도 써 지 않았다 식의 결론이 유행했지요.
그런가 하면 세 주인공은 무자진경을 잃고 다시 또 천신만고 끝에 또 하나의 경전을 얻게 됩니다. 이번엔 글자 있는 유자 진경(有字眞經)이었지요. 다시 흥분한 세 주인공. 그런데 이번에 별안간 일진광풍과 폭우 번개가 내려치면서, 경전이 흠뻑 젖고 맙니다. 그들은 햇볕이 나기 무섭게 경전을 말리지요. 하지만 그 중 몇 장은 끝내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아, 경전을 제대로 해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삼장법사는 낙담합니다. 그러자 손오공이 말하지요. “무릇 하늘과 땅에는 모자람이 있는 법인데, 우리가 완전한 경전을 얻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몇 장을 붙여 버림으로써, 불완전함이란 진리를 깨우쳐 주려는 걸 겁니다.” 이런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순응한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가 아닐까요? 가벼운 듯 우스운 듯 하찮은듯한 행동이나 이야기 속에 깃든 깊은 성찰거리들, 화두들을 위해서 [서유기]를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만드는 날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불완전함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을 깨우치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7년 5월 24일 방송>
2. 소위 <악한 청지기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이만저만 생길 것이 분명합니다. 주인에게 두 번 세 번 못할 짓을 하는 횡령죄를 범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식을 벗어난 주제를 취급할 때는, 반드시 그 핵심을 찾아내는 데 눈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주인에게 눈에 난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제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만, 살펴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일꾼을 그만두게 할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1급 비밀이 어떤 경로로 그 문제 일꾼에게 알려졌고, 그 문제아는 이번에는 한 수 더 떠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반액으로 낮춰주는 계약서를 쓰게 합니다. 기름을 안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죽으려면 무엇인들 못해 하는 막가파 인생을 보는 듯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전혀 생소한 주제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게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 얼굴이 벌게지면서 따지고 싶은 말씀입니다.
지혜라는 말을 “삶의 기술”이라고 설명하는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지혜문서>를 강의할 때 입버릇처럼 쓰는 말입니다. 지혜는 참 지혜는 삶과 직접 연결되는 생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삶을 짊어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때로 윤리나 도덕과는 거리감을 둘 수 있습니다.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삶보다 더 우선하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보다 더 우선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정답만 쓰면서 살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바르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삶은 보호되어야 하고,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악한 청지기는 그의 행위대로 단죄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진 것 같지 않습니다. 주인의 결연한 의지는 추호도 연민이란 것을 찾을 수 없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미래를 충실하게 준비해 놓은 것도 아닌 것 같고 말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기회뿐입니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는 상식을 벗어난 생각을 실천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지혜라고 말씀하고 입습니다. 그 청지기가 생각했던 기회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못보실 리 없습니다. 그 청지기에게는 주인에게 뿐 아니라, 자신과 그 가족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삶의 지혜라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 주인은 사양했을지라도, 주님은 받아주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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