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7(2007. 6. 12. 화요일).

시편 시 97:8-12.

찬송 50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장미]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그 꽃 일곱 송이는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 이 세상의 순수의 증거 같았던 피천득 선생, 소년처럼 미소 짓고 아이처럼 기뻐하고 자꾸 감동하며 감탄하던 97의 피천득 선생은, 지난 25일 밤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최인호 작가는 피천득 선생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전생에 업도 없고, 이승에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 라고요. 그 어떤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작가의 글은 노력하면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아도, 피천득 선생님의 글은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다.” 고 말이지요. 솜씨는 흉내를 내도, 마음은 흉내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렇게 다른 욕심 없이 오직 사랑에 대한 욕심밖에 없던 저자는, 어느 날 꽃병에 꽂아 두고 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삽니다. 그런데 장미 일곱 송이를 사들고 거리에 나서니, 사람들이 그 꽃을 보고 지나갑니다. 그 후의 글은 이렇게 이어지지요. “전철을 기다리고 섰다가 와이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 째 앓는데 약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일곱 송이 장미 중에 두 송이를 주었으니, 이제 다섯 송이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글은 이렇게 이어지지요. “와이와 헤어져서 동대문에서 전철을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쌓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시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는 전차가 벌써 종묘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시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시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 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이렇게 해서 일곱 송이 장미 중에, 이제 세 송이만 남게 됐지요. 그런데 과연 그 세 송이는 그가 가질 수 있었을까요? “숭산동에서 전차를 내려서 남은 세 송이의 장미가 시들 새라, 빨리 걸어가노라니 누군지 뒤에서 나를 찾는다. 케이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케이가 내 꽃을 탐내는 나는 남은 꽃송이를 다 주고 말았다.” 이렇게 일곱 송이 장미 중에 남은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저자는 집에 와서 비어있는 꽃병을 보며 이렇게 썼지요. “집에 와서 꽃 사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꽃병을 보니 미안하다.”

   제자들에게 빌려 주었기 때문에 책도 별로 없고, 벽에 못을 치면 옆집에 소란스러울까? 그림은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거나 바닥에 세워두고, 침대는 1인용 간이침대, 소파도 없이 살아오신 피천득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이지요.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 레온이 세운 것이지만, 그의 것이 아니고,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의 것이거든요. 꼭 좋은 그림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지요.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됩니다. 좋은 기억은 욕심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528일 방송>

 

2. 누가복음서 기자는 연민(compassion/함께 나누려는 마음)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유난히도 그의 시대에 버림받았던 존재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을 수없는 이런 포근한 얘기들을 많이 들려주는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것들의 비유-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그리고 <거지 나사로의 비유>(16:19-31), <종의 품삯 비유>(12:47-48), <열 문둥이 말씀>(17:11-19) 등이 그런 내용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문서(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한 저자의 글이라는 이해에서 같이 묶어서 일컫는 신학용어임)를 읽을 때는 눈시울이 젖게 마련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그 속상하게 하는 한 마리 양 때문에 고생을 하는 목자의 얘기이면서, 절대로 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절박한 목자의 고된 삶을 엿보게 합니다. 그리고 <잃은 동전 비유> 역시 수 천만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푼돈 동전 한 닢이 소중한 가난한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얘기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연민을 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들 주변에는 여전히 그런 삶의 무게를 힘겨워하며 한숨짓고 눈물을 뿌리는 이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들 있을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고 계셨다면, 지금 우리들도 그래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이 비유를 해석하는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하고 따라야 할 바로 그 주제가 아닐까요? 평생을 이런 연민을 품고 사셨던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또한 작지만 그런 연민에 동참하면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헛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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