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8호 (2007. 6. 13. 수요일).
시편 시 98:1-4.
찬송 3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구름이 하늘위로 두둥실 흘러 갈 때, 저 구름 따라서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곳은 언제나 여기가 아니라, 저기이기 때문이겠지요. 구름은 흘러가는 속성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담기에 좋은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김용호 시 김동진 곡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은, 구름 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는 그러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름 따라서 그리움도 행복이 깃들어 있는 마음도 함께 흘러가라는 시인의 목소리에서 한 없이 자유롭고, 한편으로 좀 허전한 마음을 읽습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내 마음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지요. 맑은 하늘 위에 떠 있는 한 조각 한가로운 구름처럼, 현실은 좀 고될지라도 희망에 찬 미래를 꿈꾸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 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가없는 하늘 위에 별 빛도 흘러가라. 황홀한 날이 와서 찬란한 보금자리, 날 오라 부르네. 쌓인 정 이룰 이곳에 별빛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구름을 사랑하고 노래한 예술가가 많이 있습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역시, 구름을 사랑했던 시인의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김용호 시인의 작품을 읽고서, 김동진 선생이 이 시에 서정과 낭만을 불어넣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많은 작곡가가 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고심합니다만, 김동진 선생은 특히 정서적이며 감미로운 분위기의 시를 선택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스스로가 밝힌 적이 있지요. 시를 음미하는데 숱한 시간을 보내지만, 일단 펜을 들고 오선지를 대하면, 악상은 일사천리로 쏟아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곡도 작곡가의 그러한 고심 끝에 탄생된 곡입니다. 오랜 시간 시를 낭송하고 다니다가, 정작 멜로디가 떠오르자 하루 만에 완성한 곡이라고 하네요. 김동진 선생의 대표곡 중의 하나로 1960년경에 나온 영화 [길은 멀어도]의 주제가이기도 했습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5월 28일 방송>
2.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가 “최대의 문학걸작”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입니다. 우리에게는 <탕자의 비유>로 익숙하게 소개됐지만, 독일교회의 설교자 헐무트 틸리케는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로 우리를 깨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76년부터 그렇게 읽고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1976년은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해입니다. 무슨 얘기든 누구에게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얘기의 내용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탕자가 된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쩌면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철부지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인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허점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합니다. 제 멋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듯이 판단하는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언제든 생각을 고쳐먹으면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확신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초점을 두느냐가 중요하고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초점을 두게 하는 것, 이것이 평범한 세상의 논리이며 철학입니다만, 기독교회의 가르침은 이와는 정 반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것인 때문이지요.
이 비유에서 주연은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자연히 조연이 될 수 밖입니다. 물론 스토리는 둘째 아들에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주연이신 아버지의 침묵이나 등장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가 집을 나서겠다고 아버지에게 찾아오기 훨씬 이전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하고 말입니다. 그 뿐이 아니지요. 둘째가 제 몫을 챙기겠다고 아버지를 졸랐을 때도, 몇 번씩이나 그게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를 타이르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원하는 돈을 챙겨주면서 당부하고 당부하는 그 모습을 말입니다. 아들이 아첨꾼들에 둘러싸여서 허랑방탕하고 지내는 그 순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며 제발 몸이나 성했으면 하고 기도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날도 예외 없이 아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듯 떠나가 버린 동구 모퉁이 정자나무를 그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 아버지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언제든 안아 줄 너른 품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사랑 가득한 아버지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저는 가끔, 정말 가끔 이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돼지우리에서 뒹굴다가 오물로 더럽혀진 이 모습 이 대로를 덥석 안아 주시고 뺨에 입을 맞춰주실 이 아버지를 말입니다. 그 때, 참 평안과 위로를 느끼게 됩니다. 내게는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저 만치 햇빛을 가리려 이마에 손을 대고 살피시면서 서 계십니다.
3. 오늘 성서편 강의가 끝납니다. 내일부터는 생활편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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