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6(2007. 6. 11. 월요일).

시편 시 97:1-7.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채봉의 [20살 어머니]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엄마, 남들은 아기였을 때, 입이 열리면서부터 부른다는 이 말을, 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처음 부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이렇게 엄마라고 불러보지 않으면 영영 내 혀는 엄마를 모르게 될까봐, 글로 써놓고 소리 내 불러 보내요. 엄마, 라고.” 정채봉의 동화집 [물에서 노온 새]는 동화집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돼 출판됐고요. [입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는 뉴욕 대학교 동양어학과 한국어 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지요. 17살에 시집와서 18에 그를 낳고 스무 살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묻곤 했지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정말 냄새 밖에 없느냐? 정말 엄마를 형수라고 불렀느냐?

   저자는 어릴 때 엄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고백 합니다.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소리에 아이는 자다가 눈을 떴지요. 이내 아빠가 엄마 뺨을 철썩 올려붙이는 소리가 났고, 엄마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는 무서워서 할머니 방으로 도망을 쳤고, 할머니는 아이를 끌어안고 잠을 재웠지요. 그 때 뺨 맞은 엄마를 두고 도망 나와 버린 일, 할머니 손을 끌고 가서 말려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걸려 있습니다. 또한 엄마한테 형수라고 불렀던 일인데요. 어릴 때 엄마에게 형수라고 부르자,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라며 딱 한번 화를 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잘못을 고합니다. “자식으로부터 엄마 소리를 듣고 싶어 하셨으나 듣지 못하고 가신 스무 살 엄마.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린 일은 아직껏 아버지와 합장을 못시켜 드린 일인데요.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자는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러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 쪽 동생이 하얀 끈으로 목걸이를 해서 가슴에 안은 유해를 저자에게 넘겨주었지요. 그 때 일본 새 어머니와 동생이 울었습니다. 저자도 그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갔던 숙부는 유해를 모셔온 김에 어머니와 합장을 시키라고 하셨지만, 저자는 마음에 남은 응어리 때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요. 어린 시절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서 그곳 가정을 이루어 사는 동안, 저자는 할머니 손에 커야 했습니다. 어린 손자가 심통을 부려서 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면, 할머니는 손자의 도시락을 들고 학교의 담 밑에 우두커니 서 있곤 했지요. 가난과 외로움의 한 때문에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저자는 엄마에게 약속을 합니다. 이제 두 분을 함께 모시려 한다고요. 그리고 이렇게 글을 마치지요. “엄마께 한 가지 감사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얀 눈이 소복 소복이 내리는 음력 동짓달에 저를 낳아주신 것입니다. 엄마, 제가 엄마를 만나러 그 쪽 별로 가는 때에도 눈 내리는 달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2001, 그가 원했던 대로 눈 내리는 겨울에 세상을 떠난 동화작가 정채봉씨는 또 이런 글도 남겼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신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55분만 온데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한번이라도 엄마하고 소리 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 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엄마라고 소리 내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의 소원일 수 있겠지요. 곁에 계셔주시는 어머니, 또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셨지만 마음에 늘 계시는 어머니께 아이처럼 엄마라고 불러보면 가슴이 먹먹한 기분이 드는데요. 우리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그저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아리고 눈시울이 더워지는 이름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518일 방송>

 

2.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는 제자도(弟子道)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무엇이냐? 라는 물음 앞에서는 망설이게 됩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힘든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하신 두 개의 비유를 묵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망대 비유><전쟁터에 나가려는 임금 비유>로 이 둘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행동하기 전에 철저하게 셈부터 하라고 말입니다. 요사이 어느 대선주자의 <대운하 계획 청사진>을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효과(경제성)가 있는 일이냐에 초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비하만 하지 말고 철저하게 계산해 보는 일 같은 논쟁이야말로 국민이 바라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 역시 그저 들뜬 감상이나, 뜬 구름잡듯 하는 맹신(盲信)에 자신을 내던질 것이 아니라, 냉정한 머리로 차분히 따질 것은 따지는, 셈부터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설계하고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매일 부딪혀야 하는 싸움판 같은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저 뜨거운 가슴만을 가지려 하지 말고, 차가운 머리를 써보라고 말입니다. 무조건 믿습니다하며 물불 안 가리고 머리를 디밀 일이 아니라, 차분한 머리로 하나 둘 체크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따로 떼어 놓기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도 솔직히 인정해야 하며, 할 수 없다면 그게 주님의 마음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시는 주제인지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무조건 달라고만 하지 말고 말입니다.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분별치 못하면서, 그 뒷감당을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3. 오늘부터 청주 베델강습회가 열립니다. 묵상식구이신 엄현섭 박사님과 팀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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