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4(2007. 6. 9. 토요일).

시편 시 96:1-7.

찬송 22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파트리크 쥐스켄트의 소설 [비둘기]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빈털터리가 되고, 저런 밑바닥 인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확실해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부서지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궁금해졌다.” 세상 밖에 나오지 않고, 모든 문학상도 거부하며, 은둔하는 작가. [향수]의 작가로 잘 알려진 파트리크 쥐스켄트의 소설 [비둘기], 비둘기 하나가 침입하면서 벌어지는 인간의 심리를 다룬 소설이지요.

   조나단 노엘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다보니, 사람들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는 그동안 저금해 두었던 돈을 몽땅 찾고, 짐을 꾸려서 파리로 떠나지요. 파리에서 그는 큰 행운을 두 개나 잡았는데, 은행의 경비원으로 취직되었고, 7층 건물에 아주 작은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방까지 올라가려면, 뒷마당을 지나 짐을 옮길 때나 사용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비좁은 복도를 지나가야 했지요. 조나단 노엘은 그 방을 월세로 얻었습니다. 그는 아침이면 경비원으로 일하는 은행에 갔다가, 저녁이면 빵과 소시지와 사과와 치즈를 사 갔고 와서 먹고, 자면서 그 평화로움에 행복했지요. 일요일이 되면,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고, 방을 반들반들하게 닦거나, 침대보를 새 것을 바꿔주곤 했습니다. 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방을 코딱지만 한 방이라기보다는, 배의 선실이거나 고급 기차의 침대칸처럼 보이게 만들었지요. 그 방은 그에게 있어 불안한 세상의 안전한 섬 같은 곳이었고, 도피처였고, 돌아와 쉴 수 있는 애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습니다.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에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 있었지요. 낙타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빨간색 갈퀴 발톱을 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비둘기였지요. 비둘기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체,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봤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후다닥 방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왔고, 안전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까지 갔지요. 그는 심장마비나 뇌졸중, 혈액순환 장애에 걸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비둘기는 아무대로나 마구 돌아다니고, 발톱으로 할퀴는가하면, 눈을 콕콕 찌르기도 할 거라고요. 쉴 새 없이 집을 더럽히고 무시무시한 박테리아균을 털어놓거나, 뇌막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몰고 다닐 거라고. 더구나 다른 비둘기를 꼬드겨서 데리고 들어오고, 새끼가 번식되고,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나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요. 조나단은 당혹스럽고 절망적인 나머지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저 비둘기로부터 구해 주소서.” 조나단은 은행 앞 광장에 잠들어 있는 거지를 보며 두려워 집니다. 저 벤치에 누워있는 거지처럼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조나단은 짐을 싸들고 나와서 여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이렇게 독백하지요. “내일 자살해야지.” 그 밤에 비가 내렸고, 다음 날 맑게 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가보니, 그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평화로운 방을 침입하는 작은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일상이 헝클어져 버리고 죽음까지 생각했던 조나단. 소설 속 괴짜 남자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손해를 보고, 그 때문에 상처를 받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의식이 발동합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누가 가져갈까봐 조바심 나고, 어렵게 얻은 평화를 누가 헤칠까봐 두려워하게 되지요. 그래서 주위에 높은 방어벽을 쌓아두게 되는데, 그 벽에 갇히는 건 정작 자신이지요. 가장 견제해야 할 것은, 내 것을 움켜쥐고 지키려고 동동거리는 그 조바심이라는 것을.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그러한 피해의식이라는 것을. 한낱 비둘기에 놀란 가슴 쓸어내리던 조나단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525일 방송>

 

2.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乖離)가 있게 마련입니다. 안식일 바리새인의 집 오찬에 초대된 주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손님을 초대할 때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진짜로 복 받는 일이라시면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고 구체적으로 그 대상들을(12-14) 언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함께 먹던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라고 훈수를 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 식탁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늘나라 식탁에는 놀랍게도 가난뱅이들과 병신들이 초대받는 곳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자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말에 이어서 놀라운 얘기를 꺼내십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사람들은 말이나 고백과는 달리, 그 하늘나라 식탁에서 먹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이냐고요? 미련한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하늘나라 잔치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어떤 잔치의 비유가(16-24) 그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잔치의 내용과 성격을 잘 몰라서도 아니고, 차라리 영원한 삶보다는 찰나적인 이생밖에는 품을 수 없는 때문이라 생각하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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