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20(2007. 6. 15. 금요일).

시편 시 99:1-5.

찬송 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매트릭스>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거기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이 나오는데요. 하나는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된 가상의 세상, 또 하나는 복제되지 않은 진정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 영화를 보면서 저런 세상이 정말 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세상을 나누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상에 놓인 선택의 다리위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 당신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내가 사는 세상이 바로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조금은, 조금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쉽고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일은 열심히 하는데 보람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에 일과 보상이 조화롭게 연결되기를 바란다던가, 아니면 매일 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잠을 잘 시간이 모자란다면, 좋은 책을 읽고 나서 깊은 잠을 자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식을 말하는데요. 한 쪽은 두려움과 좌절에 툭툭 발이 걸려 넘어지는 거꾸로 된 세상이고, 또 다른 한쪽은 몸과 마음의 행복이 중요시 되는 바로 선 세상입니다.

   [플립]이라는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리피, 제럴드 로제는 이 두 세상 중의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세상에서 살고 싶으냐고 독자에게 질문을 하는데요. 여기서 플립(flip)이란 과거 농경 상회에서 산업사회, 다시 지식사회로 문명이 진보되었듯이,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서 인류는 이제 영적 혁명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의식의 전환으로 새로운 삶, 즉 바로 선 세상에 사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리고 플립을 실현하면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체로, 현명하고 또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플립스터(flipster)라고 부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미국에서만 약 5천만 명, 또 유럽에서는 약 8천만 명의 플립스터가 활동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하네요.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다리가 쇠사슬로 묶인 체,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도는 그런 훈련을 받지요. 세월이 흘러서 몸집이 커지고 또 말뚝을 뽑을 만큼 힘이 세어진 후에도, 코끼리는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돕니다. 원을 그리며 돌게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텐데요. 나는 지금 서커스단의 코끼리인가? 아니면 내 삶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겠지요<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531일 방송>

 

2. 심리학 용어 중에 방어기재(defense mechanism) 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름꾼이 제 발이 저려서 노름꾼을 헐뜯음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거침없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이런 식이었겠지요. “그거 말이라고 하슈? 그런 나쁜 놈을 두둔하다니 말이요.” 라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를 이 세대의 아들들”(8)과 같다고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패역한 이 세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패역하지 않은 사람들, 소위 자칭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 당시로써는 바리새인이 해당이 되겠지만, 오늘 날에는 주일 날 성장(盛裝)한 차림새로 예배하러 교회를 찾는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듯 말씀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15) 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인 우리 자신들 역시 이 세대의 아들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사람들 앞에서 위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솔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미움을 적게 받으리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버리 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8).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경건하다는 바리새인들에게 합법을 가장한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고, 세태를 고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혹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하신 분이 계십니까? 거기에는 어김없이 검은 양복에 긴 외투까지 걸치고 검은 중절모를 쓴 소위 <정통 유대인>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학자들과 함께 참가했던 순례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유대인은, 바로 그 정통 유대인들 가운데는, 자기 아내가 몸을 팔면서 지내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무위도식하는 남편을 살려주려는 거룩한(?) 행동이라고 부연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현장에서, 옳고 그름을 시비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비난하지 말라. 그 비난으로 네가 비난을 받을 지로다.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3. 오전 강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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