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21(2007. 6. 16. 토요일).

시편 시 99:6-9.

찬송 22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는 건 어쩌면, 매 순간 선택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쇼핑을 하는 것에서부터, 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 하는 것까지,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선택의 순간에 서 있지요.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도 하고요. 이런 선택 중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의 하나가 아마 사랑에 대한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외로요. 삼들은 사랑을 얻고는 싶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랑을 얻고는 싶은데 우물쭈물 하면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아일랜드 출신의 스태니슬라우스의 케네디 수녀는 365일 기도하고 당신을 담은 책, [영혼의 정원]에서 이런 글을 씁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인정할 때, 우리의 자아는 상처받기 쉬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나약함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서 영혼이 사랑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욕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차피 한 가지 선택만이 남습니다.”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고독의 성에서 쓸쓸히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세상은 이런 위험한 가시 울타리로 만든 담장 안에 있는 성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은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 보다는, 그 가시울타리를 뛰어 넘다가 다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수녀들의 일상은 기도에서 시작해서 또 하루 일과를 마치는 기도로 마무리 한다고 하지요. 기도가 일상에 접목되면, 사랑의 순간에 용감해 지겠지요? 기도는 종교의 유무와 또 종류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 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케네디 수녀의 이 사랑의 욕구와 또 선택에 대한 생각을 읽으면서, 사랑을 하면 왜 가슴이 아픈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군요. 그런데 사랑을 하지 않고는 생의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이것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요. 그래서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의 원인이 사람에 대한 의심이니까요. 의심하는 마음은 악마의 손톱자국처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또 사랑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지요. 사랑 없이 사느냐? 사랑을 하고 사느냐? 이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페라 리골레토에서요. 질다가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을 생각하면서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질 때 부르는 노래, <그리운 이름>이 그런 선택의 노래이지요.<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528일 방송>

 

2.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께서 지어내신 창작물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로 천국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예상 밖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가톨릭 대주교의 말씀인데, 자신이 꿈속에서 본 천국 거주민들은 전혀 상상 밖의 사람들이어서 놀랬다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오리라고 기대됐던 사람들은 보이 않았고, 둘째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보였고, 마지막으로는 자신 같은 꼴불견도 있어서 놀랬다고 했습니다. 농담처럼 스치고 말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본문의 주인공으로, 한 때 세상에서 부자로 온갖 호사를 누리던 사람의 대문 밖에서 구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건 주는 대로 잘 받아먹고, 온갖 욕설까지 들어야 했던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데 반해, 그 부자는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목이 타서 죽을 지경으로 살고 있는 현실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극적인 반전(反轉)이 아닙니까?

   무슨 얘기입니까? 세상과 천국은 정 반대의 세계라는 뜻입니까? 그렇게 간단히 정의하거나 속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의 깨우침은 이렇습니다. 천국은 세상 다음의 삶이라고 할 때, 세상은 천국을 준비하는 단계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미래가 왜 역전되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부자는 무슨 생각을 실천하면서 살았을까요? 그는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했을지 모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진수성찬과 아첨꾼들의 읍소(泣訴)와 흥을 돋구는 노래들을 즐기면서 사는 일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 속에는 여기가 낙원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인생은 없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부자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헌데를 매만지며 고통을 참아야 했던 거지 나사로는 어땠을까요? 그는 하루하루가 모질고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만 감으면 아름다운 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적어도 헌데가 아물어지는 건강한 생활과, 하루 세끼 밥을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그런 나라 말이지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나라에는 사람들이 마음씨가 곱고 착해서 자신 같은 사람을 불쌍하게 대해 줄 것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꿈대로 되었을 뿐이라고요.

   제가 잘 부르는 노래에 <Que Sera Sera>라는 모로코 말을 주제로 한 노래가 있습니다. “될대로 되리라는 뜻인데, 자포자기하는 말이 아니라, 예정되었던 그대로 되리라는 오히려 매우 긍정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3.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집이 참 좋습니다. 천국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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