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26(2007. 6. 21. 목요일).

시편 시 102:6-11.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셨는지요? 일을 하다보면, 조리 있게 말을 해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 때도 있고, 또 그러다보면 그 말이 스트레스가 돼서 지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대화전문가 이정숙 씨는 때론 말 보다는 침묵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는데요. “나폴레온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침묵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카리스마는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기 전 몇 초 동안 침묵하는데서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침묵의 시대가 아니라, 설득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잠깐의 침묵만큼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없다.” 연설하는 것은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지 않아요? 오히려 침묵이 더 강한 설득력이 있다고 전문가는 이야기합니다. 말은 많이 하면 실수하기 쉽고요. 또 너무 말이 없어도 재미없지 않아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고 또 만난다는 것, 물을 건너기 위해 놓인 징검다리처럼 서로에게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징검다리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야 건너기가 편하고요. 침묵은 징검다리의 빈 곳처럼 대화의 적당한 시간과 또 거리를 줍니다.

   어떤 분은요. 학창시절에 이런 교수님이 있으셨대요. 그 교수님은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준비가 더 되어있으면 잠깐 동안 침묵을 하셨는데, 그러면 그 떠들던 학생들도 교탁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교수님의 침묵 때문에, 서로들 툭툭 쳐가면서 수업 준비를 하곤 했다고 하네요. 교수님의 그 침묵 조용히 해!” “떠들지 마!” 이런 말보다 더 효과적이었겠지요? 침묵은 이렇게 스스로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 같습니다. 또 상대방과 어떤 오해로 화가 났을 때,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것 보다는, 잠간의 침묵이 큰 싸움을 피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화는 누구나 나는 것이지만, 그 화를 내느냐 아니면 참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다른 삶을 산다는 틱 낫한 스님, 좋은 잠언집을 많이 만드신 분이지요. 틱 낫한 스님의 말씀도 침묵의 중요성을 은연중에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530일 방송>

 

2.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어도 신앙인들이라면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기도생활이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교회지도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가르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마저 움직인 한 과부의 간청 비유>는 매우 현실적인 그러면서도 효과적인 기도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콧대 높은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좋은 뜻으로는 강직하고, 나쁜 뜻으로는 거만한 재판관인 모양입니다. 하늘의 별따기인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가 된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법복을 입고 재판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살고 죽는 결정을 내리는 판사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한 여인은 보잘것없는 사람 과부였습니다.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판사생활에서 관상 보는 데 이력이 난 이 판사는 한 두 마디 말로 이 과부의 소청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이 과부가 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과부보다는 힘과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판사는 사람 볼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법리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판결해 왔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이 판사의 트레이드마크(상표)였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과부는 판사의 집을 매일 같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과부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판사를 찾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과부의 송사를 제대로 들어주기로 작정합니다. 그것은 과부에 대한 연민 때문만이 아니라, 그 여인의 성실함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누가복음서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괴롭혀라 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성실성 여부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오해를 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님께서 돌아보신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와 해답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선한 농부와 악한 농부에게도 똑 같이 비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왜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살려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도로 인정하고 고백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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