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64호(2012. 3. 24. 토요일).
시편 136:13-16.
찬송 20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지 히치콕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미국 화가입니다. 그는 미국의 노드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캐나다의 메리토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그런 다음 졸업과 함께 뉴욕에서 공증인으로 일했지요. 미래가 보장되는 안정된 젊은 직업인이 된 겁니다. 하지만 내면에 깃들어 있던 보다 더 강력한 열정과 재능을 계속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던 거겠지요. 그는 3년 만인 27살에 공증인 직업을 포기한 채 그림을 배우러 네덜란드로 떠납니다. 사실 그 당시는 그림을 배우거나 그리려 간다고 하면, 거의 다 프랑스였지요. 그런데 그는 특이하게도 네덜란드로 가서, 네덜란드 화가보다 더 열심히 그 나라를 그렸습니다. 덕분에 그 때까지 미술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네덜란드가, 조지 히치콕이라는 미국화가 덕분에 널리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의 그림 중 <패자>는 전형적으로 전쟁이나 경기에 패한 기사의 뒷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운 듯, 푹 숙인 고개며 축 쳐진 어깨와 땅에 끌릴 듯 내려트리어진 깃발, 거기다 말까지도 주인의 심정을 닮은 듯, 머리가 아래로 잔뜩 내려트려져 있습니다. 이럴 경우 보통이라면 주위 배경도 황량하거나 쓸쓸해야 합니다. 발밑은 패자가 걷기 마련인 쓰라린 자갈밭이거나 가시밭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 특이합니다. 고개도 어깨도 깃발도 다 축 쳐진 패자의 발밑은, 정작 튜립으로 가득 찬 화려한 꽃밭입니다. 말이 꽃 밭 가운데로 지나는 바람에 꽃들이 약간씩 꺾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꽃밭이 엉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꽃들도 머지않아 환영하듯, 옆으로 길을 틔워줄 것 같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패자 같아 보여도, 자신만의 선택을 과감히 그 기준에서 벗어난 진정한 승자의 모습이자, 그들이 가는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결혼을 앞둔 남자와, 법률 전문가의 길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고, 남들 다 선택하는 프랑스 대신 네덜란드를 선택한, 조지 히치콕의 모습을 거기에 겹쳐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2월 24일 방송>b.
2. 변화 산에서 내려온 주님 일행이 만난 것은 벙어린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들의 증세를 말씀드리고는 의사에게 말하듯 “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중략> 도와주옵소서.” 라고 부탁합니다. 그 때 주님은 꾸중하듯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아비 된 이가 믿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귀신들렸다는 환자는 현대 의학에서는 귀신이 들린 정신질환자라기보다는 <장미병(薔薇病)> 환자로 분류합니다. 증세를 보일 때 편안히 눞혀두거나 안고 있으면, 몇 분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에 <장미병>으로 부르기도 하고, 시저나 나폴레온이 앓았던 병이라고 해서 <황제증>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병명을 구체적으로 부를 수 없었던 옛날에는 고치기 힘든 병들은 의례히 귀신들렸다고 했던 점도 기억해 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오용 내지는 곡해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해야 하겠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내가 희망하는 대로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긍정의 힘처럼 사용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전인수식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의 주체가 우리들 인간이 되어서도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들 삶이나 문제들의 중심에 서 계시는 주님이 주체가 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뜻과 의지와 행동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대나 희망사항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믿어야 할 것은, 주님의 뜻과 행동이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으로 아무런 불만도 불평도 갖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모로코의 말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될 대로 되리라)를 자주 기억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주님이 계획하신 대로 될 것이라는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가져야 할 최상의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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