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567(2019. 5. 10. 금요일).

시편 8:3-5.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회사에 큰 공을 세운 어느 사원의 소식을 들은 사장이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그 사원을 불렀습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대견했던 사장은 그에게 뭔가 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았지요. 그 때 문득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바나나가 생각났고, 얼른 그걸 꺼내서 사원에게 줬습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선물, 그런데 그 마음이 의외로 사원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얼마나 고마우면 드시려던 바나나를 주셨을까 싶어서,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는 데요. 그 뒤 그 회사에서는 금으로 바나나 모양을 만들어 상을 주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실화 같지 않은 실화는 어떤 책에선가 보았던 어떤 회사의 이야기였는데요. 격식도 거창함도 없지만, 두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지요.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주는 혹은 대리인이 전해주거나 문안을 누군가 대신 읽어주며 전달하는 의례적인 상보다는, 마음이 절로 움직여 감동을 전해주는 상을 받는다면, 기억에 오래오래 남겠지요. 그 자리에서 바로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받으며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단순히 상을 넘어서서 가장 좋은 선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성적을 잘 받아오면 이러이러한 상을 주겠다고 부모가 약속하는 경우도 많지요. 텔레비전은 얼마큼 더 봐도 된다. 게임할 시간을 주겠다. 혹은 여러 선물이나 나이에 따라 학년에 따라 주기도 하는데요. 학교에서도 간식거리나 스티커, 숙제 면제 티켓 같은 걸 주기도 하지만, 상을 주면서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게 되고, 또 아이들 역시 성장해서도 상이 있어야 노력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으니,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심이 담겼을 땐 서로 기뻐할 만한 상을 주고받기, 쉬운 일이 아닌데요.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의례적인 게 아닌 진정과 감동을 담은 상, 우리는 과연 언제 받았거나 줘 봤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6825일 방송>

 

2. “인사(1-3)”, “속이는 자와 그리스도의 적(4-11)” 그리고 작별인사(12-13)” 들 읽었습니다. 요한 이서와 삼서는 1세기 그리스 문화권에서 상용(常用)된 서신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곧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간단한 인사와 덕담이 그런 형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 일서와는 달리 자신을 장로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고, 편지를 받는 사람은 장로 요한이 그 식구들과의 교분이 있는 어떤 귀부인과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단락(4-11)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표제어에서 밝히는 속이는 자와 그리스도의 적은 같은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이서의 배경이 되는 초대 교회는 많은 거짓 지도자들 특히 그리스도의 적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점,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느 시대나 공들여 키워낸 좋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시 마귀의 자녀로 타락시키려는 음모들이 있어왔습니다. 엊그제 제 아내가 초청화가 사생대회에 참가한다고 갔다 오더니 전도지 한 장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유월절을 충실히 지키자>는 제하의 설교문 비슷한 전도지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뿌린 것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어찌하여 이런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에 계시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유월절을 교황주의자들이 부활절로 둔갑시켰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이런 거짓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기생하고 있어서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기독론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구원사업을 완성했다는 신학 이론이 확립될 때까지는 끊이지 않고 등장했던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학이란 성경의 중심 진리를 체계화 시킨 이론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혼란을 막고 질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물론 신학이 하나님의 진리를 다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신학은 계속 진화 중에 있습니다.

 

3. 봄비가 내리지 않아선지 뿌린 꽃씨와 채소 씨들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돌봐주시지 않으면 농부의 수고가 헛될 수 밖임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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