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50호(2012. 9. 26. 수요일).
시편 35:25-28.
찬송 53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왕자처럼 기르면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 돼야 한다도 아니고, 되면 좋겠다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미래를 들여다 본 것처럼 될 거야 라고 했습니다. 여느 부모처럼 아들을 격려하는 말로 들을 수도 있지만요, 그들의 현실을 보자면 코웃음이 나올법한 허황된 꿈이었습니다. 소년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오래전에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첫사랑을 찾아서 떠나버렸으며, 어머니는 그저 무명 배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는데, 성공하고 행복해지려면, 프랑스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급기야 믿음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 어린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프랑스 니스로 떠나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며 홀로 억척스럽게 아들을 키웠지요. 이 아들은 어머니가 늘 말했던 대로 프랑스 대사가 됐을까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 이 아들의 이름은 로멩가리. 그는 2차 세계대전에 프랑스 군으로 레지옹 드네르 훈장을 받았고, 외교관이 돼서 세계 각국의 프랑스 대사를 두루 역임했으며, 콩크리 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쳤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1938년 24살의 로멩가리는 살롱드 프로방스 공군사관학교에서 장교 임관을 거부당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지어냈지요. 전쟁이 발발하자 아픈 어머니를 남겨둔 채, 그는 공군으로 자원으로 입대했습니다. 어머니에겐 그는 장교였으니까요. 어머니도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아들이 니스로 돌아오기 3년 전에 이미 숨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로멩가리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장교로 목숨을 걸고 전투중인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알면 슬픔과 좌절에 빠질까 걱정했고, 그래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수백 통의 편지를 미리 썼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부탁했지요. 자신이 죽으면 아들에게 한 통씩 붙여달라고. 그렇게 어머니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참말의 반대말인 거짓말. 그런데요. 세상에는 이처럼 참말보다 더 감동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만들어낸 사랑이 세상 그 무엇보다 진실할 때입니다.
<KBS FM 1,출발 FM과 함께, 2012년 7월 19일 방송>
2. 죽음에 대한 이해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절망이고 슬픔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이해할 때는 조금 후에 깨어날 일이니 희망이고 축복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어떻게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멈춰 설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거듭 부연하는 말씀입니다만, 성경은 어떻게 라는 인간의 생각에 대답하는 말씀이 아니라, 왜 라는 물음에 답하는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생명은 죽음 아래에서 왜 멈출 수 없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의 주제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사랑하시는 구체적인 내용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죽음을 생명의 불연속선이 아니라, 연속선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잠을 잔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깊은 잠, 나흘씩이나 깨어날 수 없는 곤한 잠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사로를 편히 잠들게 하지 않고 깨우신 것입니다. 제가 어디에서 읽은 것 가운데, 사람이 평생 잠자는 데 쓴 시간이 거의 3분지 1 정도라고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잠자는 시간을 원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까닭은 일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눈을 뜨고 지내는 시간은 골치 아픈 문제들뿐입니다. 책을 읽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심지어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썩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무엇을 하든 일하는 동안만이 삶을 의식하고 누리는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 육신 죽으면 썩을 텐데 뭘 아끼느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40년을 혼자 몸으로 저의 아홉 남매를 키워내신 것입니다. 일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깨우셨습니다. 나사로가 기쁨과 슬픔을, 희망을 절망을 느끼며 삶을 짊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
3. 스테로이드가 이렇게 잠을 요구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멀쩡한 정신을 가지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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