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39호 (2013. 7. 12. 금요일).
시편 시 105:26-30.
찬송 5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지독하게도 그리스어가 싫었다. 그래서 결국 4학년으로 유급되고 말았지만, 가정교사를 불러가며 5학년으로 진급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여러 관청에서 근무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지적인 노동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했던 공부와 직장은 정신적인 긴장이나 재능, 개인적은 능력 창조적인 영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인 일일 뿐이었다.” 안톤 체호프의 소설 [나의 인생]의 주인공 미하일은 이렇게 혼자 독백합니다. 그는 좋은 귀족가문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요.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을 뿐, 다른 모든 면에서는 귀족집안 특유의 풍족함을 얼마든지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귀족들이 당연한 듯 선택하는 직업, 소위 지적인 직업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들 벽돌을 나르거나 칠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식의,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에 더 관심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런 아들을 귀족인 아버지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지요. 아버지는 아들을 한없이 꾸짖으면서, 정 네가 몸을 쓰는 허드레 일을 한다면 네게는 어떠한 유산 상속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미하일은 유산 상속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해서, 아버지를 더욱 화나게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겪은 바에 의하면, 귀족들이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직업이나 일도 실은 단순 반복의 연속일 뿐입니다. 오히려 빈둥대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 낭비를, 지적인 일이라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건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도 적성과도 아주 먼 것이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4월 16일 방송>a.
2.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한 위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평행귀 막 15:21).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특별한 경험을 한 유일한 사람인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으나(마 16:24), 주님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 주는 그런 엄청난 과제는 주신 일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미래가 늘 궁금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 후에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그의 아내에 대한 기록이 로마서에 나옵니다(롬 16:13).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미에 몇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안부를 전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아주 짧지만 인상적인 대목이 그것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말입니다. 이 편지로 봐서는 구레네 시몬은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난 듯 하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로마에서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 사도 바울은 그와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마터면 묻힐 뻔 했던 위인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깨우침을 가져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에도 끼워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들을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만들어 주실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얼마나 어깨가 올라가는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감격스러운 이유입니다.
3. 어제는 종일 고민하고 힘들게 작업했던 모든 자료들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드롭박스(Dropbox)만 믿고, 다른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또 힘을 내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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