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56호 (2013. 7. 29. 월요일).
시편 시 107:19-22.
찬송 54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한 세월이 어언 반세기가 가까운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서 한 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미안하다 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벌써 옛날 일이지만, 남편이 실직해서 대신 생계를 책임졌던 시절에도,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내가 일부러 노는 게 아니잖아.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난들 어쩌겠어.” 다시 직장을 구해 일하면서, 일주일에 닷새는 늦게 들어올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내가 일부러 늦게 들어오는 게 아니잖아. 회사가 그런데 어쩌겠어.” 하기는 부엌에서 컵을 깬 아들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러 깨트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사람 사는 일이 스스로의 의도나 선택과는 무관할 때가 많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의 내가 돼 버린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의도치 않은 결과라서 사실은 내가 가장 억울하고 속상합니다. 당연히 나를 바라보는 일을 대하는, 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 라는 말은 바로 그럴 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거나, 운이 없었다거나 하는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할 게 아니라, 벌어진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미안하다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면, 왜 일이 이렇게 됐는지, 무엇이 잘못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준 상대방과 더 친밀해 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서 미안하다고 해 준 사람이 너무나 고맙기 때문입니다. 가장 미안한 사람이 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커다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7월 5일 방송>
2. 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세 번째 안식일에 비시디아 안디옥 유대인 회당에는 그곳 시민들이 거의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발동했고, 사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호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수시로 적대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흔들어 보려고 할 것이고 회의와 두려움을 심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힘들어 하는 부분이란 확연히 구별되는 신앙의 내용일 때가 아니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일 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인들이나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런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예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민인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유대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강하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들 기독교 세계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야하고 일어날 수 밖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먼저 확립해야 할 일이, 신앙의 차별화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닮은 가 보다는 무엇이 다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만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관용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차별화를 밝히기 시작합니다(46-47절).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서도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의 귀에 들려주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에게 맡기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을 택하신 참된 의도는 그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는데(창 12:1-2), 그들이 그 귀한 소명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3. 오늘의 교회는 그 존재의미에서 많이 이탈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 버린 때문입니다.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고 더 가난해지지 않으면, 이 무서운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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